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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아, 그 말이 그렇구나(성기지)

분은 삭이고 밥은 삭히고

by 한글문화연대 2013. 9. 5.

[아, 그 말이 그렇구나-9] 성기지 운영위원

 

요즘 나라 안팎에서 끔찍한 범죄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보도를 대할 때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불안한 마음은 곧 범죄자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데, 언론에서는 “분노를 삭히고 재발 방지에 힘을 모으자.”는 기사를 싣기도 한다. 이때 ‘분노를 삭히고’란 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화가 난 사람의 분노나 울분은 삭히는 것이 아니라 삭이는 것이다. “분노를 삭이고 재발 방지에 힘을 모으자.”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된다.


‘삭다’의 사동형인 ‘삭이다’는 “긴장이나 화가 풀려 마음이 가라앉다,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다.” 또는,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래서 “냉수 한 사발을 마시고는 분을 삭였다.”라든지, “밥 한 그릇을 다 먹고도 10분이면 삭이고, 또 먹는다.”처럼 쓰면 된다.


이와는 달리 ‘삭히다’는 ‘음식물이 발효되다’는 뜻을 가진 ‘삭다’의 사동형이다. 흔히 “김치나 젓갈 따위가 발효되어 맛이 들게 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가령 “새우젓을 1년 동안 푹 삭혔더니 맛이 아주 좋다.”라든지, “감주는 밥을 삭혀서 만든다.”라고 할 때에는 ‘삭이다’가 아니라 ‘삭히다’를 써야 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썩이다’와 ‘썩히다’도 자주 혼동되는 말들이다. ‘썩다’는 “음식물이 썩었다.”처럼 ‘어떤 물체가 부패하다’는 구체적인 뜻도 가지고 있고, “아들 때문에 속이 무척 썩는다.”처럼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차서 괴롭다’는 추상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


이 ‘썩다’가 ‘썩게 하다’라는 사동사로 쓰일 때에는, 두 가지 쓰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게 된다. ‘부패하게 하다’는 뜻일 때에는 “음식물을 썩혔다.”처럼 ‘썩히다’가 되는 반면에, ‘걱정을 끼쳐 마음을 몹시 괴롭게 하다’는 뜻일 때에는 ‘썩이다’가 된다. 요즘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한 흉악한 범죄자들은 그 자신이 어렸을 때에도 부모 속을 무척 썩였을 것이다. “아들이 속을 썩여서 힘들다.”, “이제 부모 속 좀 작작 썩여라.”처럼 쓰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정리하면, ‘음식을 썩히다’, ‘재능을 썩히다’, ‘감옥에서 썩히다’처럼 구체적인 경우에는 ‘썩히다’를 쓰고,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다’와 같이 추상적인 경우에는 ‘썩이다’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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