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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반미에 대하여 (9)

by 한글문화연대 2017. 7. 20.

[우리 나라 좋은 나라-68] 김영명 공동대표

 

2000년대 당시 일었던 ‘반미’에 대한 언론이나 지식인들의 비판에는 크게 두 가지 핵심이 있었다. 하나는 앞서 보았듯이 그것이 국가이익에 위배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앞의 문제는 이미 다루었으니 이제 뒤의 문제를 보자. 비판론자들은 ‘반미’ 시위를 이성에 자리 잡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린 행동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것은 감정적인 행동이었나? 사실 이런 평가는 그 시위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치적 시위나 집회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질문이다. 의회를 비롯한 정치 제도를 벗어난 거리의 집단 행동들은 감정적인 행동인가? 더 일반적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행동들은 기본적으로 감정적인가? 이에 대해 내가 내리는 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선 촛불 시위나 미 문화원 방화 사건 같은 것은 매우 감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감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죽은 자에 대해 그들이 보인 슬픔이나 미국 정부에 대한 분노 등은 감정의 소산이지만, 이것은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감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촛불시위는 매우 감상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평등한 한미관계를 향한 계산이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반미’에는 감정, 감상과 합리적 계산이 같이 있었고 섞여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반미의 반대인 친미는 어떤가? 친미적인 행동이나 사상은 감상이 아니라 국익에 대한 이성적인 계산의 결과인가? 이 경우 또한 반미와 마찬가지로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친미는 그것이 국익을 가져오리라는 계산의 결과일 수도 있고, 미국의 문화와 이미지에 대한 감성적 추종일 수도 있고, 반미 분자들에 대한 혐오라는 감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통 친미 행동에 대해서는 감정이나 감상이라고 여기지 않으면서 반미 행동에 대해서는 더 감상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보일 소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럴까?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지키는 자와 도전하는 자의 차이 때문이다. 무엇이든 이미 있는 것을 지키려고 하는 자에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다. 일이 일어나면 이미 있는 것에 변화가 올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는 세상 일이 조용히 그대로 있는 것을 원하게 되고, 되도록 조용한 것이 좋기 때문에 설치는 행동을 피하려고 한다. 일단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일을 냉정히 계산하면서 방어할 태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고 벌어지면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겉으로 냉정하고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으로 보이기 쉽다. 그 반면 도전하는 자는 일을 키워야 하고 시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있는 것을 바꾸어야 하고 못 가졌던 것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일을 벌이고 가진 자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행동은 감정적으로 되기 쉽다. 또 자신은 감정적이지 않더라도 시끄러운 행동이나 그 행동 중 많은 부분이 일어나는 거리의 모습 자체가 이성보다는 감성적으로 보이기 쉽다. 

 

그런데 일단 못 가진 자가 가진 자의 기득권 일부를 차지하게 되면 가진 자도 그냥 조용히 있을 수만은 없다. 가진 자는 스스로 못 가진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가졌다가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시끄러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원래 못 가진 자와 비슷하게 감정적으로 되기 쉽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보수 인사들이 보여준 행동들이 그와 같았다. 그러므로 감성이나 이성은 보수나 진보 어느 한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들이 각각 처한 처지에 따라 결정된다. 양쪽 다 감성, 이성을 다 가지며 경우에 따라 어느 한 쪽이 좀 더 강하게 얼굴을 드러낸다고 보면 된다.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어느 쪽에서 오든 현실에 대한 도전은 그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원초적으로 감성이 개입되기 쉽다. 효순이의 죽음에 슬픔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고는 시위를 시작할 수 없다. 그 사건 한참 뒤에 일어난 2014년의 세월호 사건, 10대 학생들이 무책임한 선장과 부패한 해운 회사와 무능하고 냉담한 정부 때문에 무참하게 죽어간 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벌써 이 문장 속에서, 또 그 무참하다는 표현 속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이유들 때문에 지키는 자보다는 덤비는 자가 더 감정적, 감성적이 되기 쉽다. 또 그 행동이 도전적이기 때문에 방어자보다는 더 감정적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친미와 반미 중 어느 것이 방어이고 어느 것이 도전인지는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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