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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말 비빔밥(이건범)

(0)-과학과 진실의 눈으로 살펴봅시다.

by 한글문화연대 2013. 7. 2.

** 다음은 이건범 대표의 글로 한겨레 훅에 연재를 하는 내용입니다. ( http://hook.hani.co.kr/archives/50104 )


4.16 한자교육 활성화 토론회. 한자교육추친총연합회 진태하 회장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으니 초·중등 교과서에 나오는 한자어는 한자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등학생에게도 한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들은 2013년 2월 18일에 몇몇 국회의원을 앞세워 “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안”을 냈다. 개정안은 교과서에 한글과 한자를 함께 사용하자는 방안을 담고 있는바, 한자 혼용으로 가는 디딤돌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자어는 반드시 한자로 적어야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이 사람들의 주장은 논리가 궁지에 몰리면 카멜레온처럼 변하므로 찬찬히 짚어보아야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다.


한자는 우리 조상의 문화와 사상, 역사를 적던 문자였고, 19세기 말까지 한자와 중국어 문법이 섞인 한문이 사회 지배층의 주류 글말이었다. 그 유산 가운데 하나인 한시는 지금 보아도 압축된 문장과 운율로 세상의 이치를 엮어내는 독특한 멋이 있다. 하지만 한자는 배우기 어려운 탓에 백성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이에 세종대왕께서 백성이 뜻을 펼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드셨다. 그럼에도 일반 민중은 삶의 형편 때문에 대부분 문맹이었거나 일부에 한해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문자혁명을 이뤄낸 대한민국


한글은 19세기 말에 와서야 국가의 공식 문자로 대접받았고, 대한민국이 세워진 뒤부터 비로소 국가와 국민의 문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한자를 사용했던 습관이 남아 교과서와 공문서, 신문 등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 한글과 한자가 함께 쓰였다. 그런데 정치 민주화 이후 1980년대 말부터 일간 신문에서 한자가 빠지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중반에는 거의 모든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졌다. 신문과 마찬가지로 교과서에 함께 쓰던 한자도 사라졌다. 어떠한 강제도 없이 벌어진 일이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슬기롭고 위대하다. 제국주의의 압제와 뒤늦은 근대화에도 굽힘 없이 세계가 깜짝 놀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데에 이어 1987년에는 정치 민주화를 이루었고, 그 뒤에는 문자 혁명을 완성하여 문화국가의 바탕을 다졌다. 그토록 오래 사용하던 한자를 버리고 백 년 만에 한글을 생활과 소통의 문자로 굳힌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지식과 정보의 전달, 의사소통에서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도 아무런 막힘이 없다는 서로의 믿음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로 적음으로써 국민 누구라도 언어 공동체에서 배제하지 않겠다는 인권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문맹률은 1%에도 미치지 않는다. 한자가 지배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 알 권리를 채워주고, 국민 모두가 문화를 꽃피우는 세상이 된 것이다.


습관은 진실의 눈을 가린다


한자 대신 한글을 선택한 국민의 현명함 덕에 지식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과 휴대전화에서 한글을 이용한 소통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빠르다. 그리고 우리 국민 가운데 그 누구도 신문, 인터넷, 책, 전화 문자 등에 한자를 적지 않는다고 뜻을 모르거나 오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눈에 한자가 익숙하거나 어떤 개인 사정으로 한자를 흠모하게 된 분들은 이런 현상이 매우 걱정스럽나 보다. 교과서, 공문서, 신문에 “한자어를 한자로 적지 않으면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으므로 한글로만 생활하는 국민 대다수가 사실은 문맹”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늘 한자가 그득했던 신문이나 책을 읽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당연히 그런 읽기 습관과 생각 버릇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초등학교에서 한글 전용 교과서로 공부했던 20대부터 50대 초반 나이까지의 성인이 그 이전 세대보다 말이나 글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런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한자어나 고사성어를 모를 수는 있지만 이는 한자에 익숙한 세대가 영어 낱말을 잘 모르는 현상처럼 그저 시대의 변화와 언어 환경의 변화가 낳은 결과일 뿐이다. 지식의 중심도 50년 전과는 사뭇 다르듯이 말이다.


한자어는 반드시 한자로 적어야만 그 뜻이 통한다는 이 사람들의 논리대로라면 한자나 한글과 같은 문자가 아니라 말소리로 전해지는 낱말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걸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한자어는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말과 문자의 관계를 무시한 억지일 뿐이다.


한자 문제의 본질은 교육 바깥에 있다


2013년 6월 초, 서울시교육청은 한자를 숭상하는 주장의 참과 거짓을 제대로 가려보려고도 하지 않고 초등학교의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한자 교육을 강화하여 특색사업으로 만들겠다는 방침까지 밝혔다. 세상에 범죄 말고 배워서 나쁠 게 무엇이 있을까마는, 그렇다고 초등학생에게 모든 걸 다 가르치려다 보면 아이들을 정신병으로 몰아넣지 않을까? 요즘은 유치원에서도 한자 급수 시험을 강요하는 곳이 있다니, 교과서에 한자를 마구 집어넣으면 한자 사교육이 얼마나 요동칠지 뻔하다.



그런데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분들은 대학생들이 한자를 몰라 예전 논문을 읽지 못한다고 개탄하면서도 정작 대학 교육의 문제점에는 입을 닫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국문학과나 사학과처럼 높은 한자 실력이 필요한 학과에서 학부 수업이나 대학원 입시에 한자 능력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음에도, 한자 없는 교과서로 아무 문제없이 40년을 이어온 초등 교육을 걸고넘어지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우리 초·중등 교육의 문제가 어디 교과서에 한자 혼용을 하지 않아서 생겼을까? 아이들의 인성 교육에 빨간 불이 들어온 까닭이 한자로 명심보감을 읽히지 않아서일까? 그런데 한자 숭배자들은 모든 문제가 다 한자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으다


이제 과학과 진실의 눈으로 이 문제를 짚어보자. 한자 혼용이나 한자 교육 강화를 주장하는 분들이 늘 꺼내 들고 휘두르는 속설 10가지를 질문으로 만들고, 사실에 뿌리를 둔 답을 달아 연재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문자 생활과 교과서를 20년 전으로 되돌려야 할 까닭이 있는지 판단해 보고 초등학생들의 무거운 어깨에 한자 암기라는 짐을 더 얹어야할지 판단해 보자.


(*연재할 글은 인지과학자, 언어학자, 국어학자, 국어교사, 고전 번역가 등 많은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씀을 밝힙니다.)


<연재순서>


1. 국어사전에 한자어가 70%나 된다던데, 사실인가요?


2. 한자어는 한자로 써놓아야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3. 한자어는 동음어가 많으니 한글로만 적으면 혼동이 오지 않을까요?


4. 초등학생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한자어의 어원을 알려주는 교육 방식이 좋지 않을까요?


5. 교과서에는 한자를 적을 수 없나요?


6. 한자를 많이 알면 국어 성적이 오를까요?


7. 한자는 정말로 우리 조상이 만들었나요?


8. 한글은 한자의 음을 적기 위해 만들었다면서요?


9. 우리 고전을 읽기 위해서라도 한자를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10. 한자를 알면 중국어 익히기에 유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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