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 역사가 기록하는 이도의 모습 -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3기 김민지 기자
minjikimmoon@naver.com

 

세종나신 날의 세종대왕상


5월 15일이 되면 자신에게 소중한 선생님께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지금처럼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정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겨레의 영원한 스승’이라 기리며 그의 탄생일(1397년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흔히 조선 시대의 왕을 말하라고 하면, 초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태조 이성계나 세종대왕을 꼽는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만든 왕이기에 그럴 수 있지만, 세종대왕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태조 이성계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글의 요소 중 하나도 문자 자체이며 인터넷, 스마트폰의 시대에도 우리가 무심코 가장 많이 읽고 쓰는 '한글'을 만든 것이 바로 세종대왕이시기 때문이다. 문자를 만든 것이 대단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전 세계의 민족들 중에는 고유의 문자를 갖지 못한 민족들도 많다는 걸 생각하면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세종대왕은 성군으로 불릴만 하다. 더불어 왕이 글자를 창제하였다는 것은 역사상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세종대왕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도 없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 ‘훈민정음’이라는 업적 때문인지, 덕분인지 그 외의 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광화문 앞의 세종대왕께서는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5월 15일, 세종대왕 나신 날을 기념하여 역사가 기록하는, 사람 이도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뚱뚱한 고자질쟁이, 이도

세종이 꿈꾸는 태평성대

세종대왕의 성은 '이', 이름은 '도', 즉 '이도' 이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불화와 잔혹한 권력투쟁을 곁에서 보며 자랐다. 고자질쟁이, 비만아, 잘난 체하기 등으로 ‘세종리더십 원론’ 수업을 들었던 대학생들은 표현한다. 1397년 5월 15일에 태어난 세종 이도의 모습은 [태조실록]과 [태종실록] 등에 단편적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실록을 들여다보면 세종대왕이 그리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궐에서 태어난 왕족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생각할 수도 있겠다. 
세종이 열 살 때, 외삼촌 민 씨 형제들은 또 다른 왕자의 난을 막기 위해서 세자 양녕을 제외한 왕자들은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한다고 태종에게 말했다. 그 말을 직접 들은 어린 세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칫하면 정치적인 이유로 말 한마디 못하고 잘려나갈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자기들의 권력 독점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민 씨 형제들은 결국 부왕 태종에 의해서 선제로 제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부인 즉, 세종의 어머니와의 대립과 갈등이 심각했다. 자칫 이혼 직전까지 간 부모님의 불화를 보고 자라서인지, 어린 세종은 성격이 그다지 좋다는 평을 못 받았다고 한다. 고기반찬이 없으면 식사를 못 할 정도로 편식했고, 그 결과 “뚱뚱하다”는 아버지의 지적을 수시로 받기도 했고, 기회만 생기면 잘난 체하고, 고자질쟁이로 형제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하는 모습이 실록의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음악과 독서를 좋아하는 셋째
그런데도 세종은 어떻게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렇게 기록은 되고 있지만, 폭행 등 나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잠깐의 반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폭넓은 독서와 악기 연주가 상처가 많은 어린 세종의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다고 한다. 세종은 어린 시절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그치지 않았고,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 등 여러 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본인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 외에 역사서나 다른 책들도 꼭 30번씩 읽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독서를 해나가며, 세종은 자신의 지식을 점검하고, 그 속의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는 것을 기반으로 잘난 척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고쳐나갔다고 한다. 부왕 태종은 열일곱 살이 되는 세종에게 “너는 세자가 아니어서 따로 할 일이 없으니, 편안히 즐기기나 하여라.” 라면서 여러 악기를 내려주었다. 이때부터 세종은 거문고와 가야금에 몰입하여 형 양녕대군을 가르쳐 줄 수준까지 되었다고 한다. 실록을 보면, 악기를 가르쳐 주고 또 배우면서 세종과 양녕대군이 다시 화합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거의 모두가 알다시피 세종은 조선 3대 왕인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셋째로 태어났으나, 위의 두 형을 모두 제치고 조선의 4대 왕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셋째가 왕이 되려면 위의 두 형이 자연사, 병사하거나 치열한 권력 싸움 끝에 형들을 살해 또는 잔혹하게 제거하고, 왕이 되거나 하는데 특이하게도 세종은 적어도 형들이 살아 있는데도 평화롭게 왕위에 올랐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게 된다. [태종실록]의 내용을 잠시 빌리자면,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 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고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의외의 야심가, 세종

사실 위인 중에 야심가가 아닌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었고 그것을 성취했기에 지금 현대인들에게 위인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에게 인자하기만 했을 것 같은 세종대왕이 야심가였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세종 대왕이 충녕대군 시절 영민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는 자신이 대권을 향한 주자의 한 명으로써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형들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세종은 두 형들보다 뛰어나다는 이미지를 태종과 신하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왕위 계승에도 성공하였다. 실록에는 “임금의 아들이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태종에게 고하기도 하고, 세자이던 양녕 대군(이제)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여 이제와의 관계가 악화하기도 했다.

왕의 아들은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다소 위험한 생각을 태종에게 고한 행위는 복잡한 계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신하의 불손한 생각을 부왕에게 고하게 되면 이를 들은 태종은 ‘아, 장자 계승이 아닌 계승을 주장하는 신하도 있구나.’라는 부분을 은연중에 인지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장자인  양녕대군에게 충고한 부분에 대해 후대의 역사학자 박시백은 "충녕대군의 행동이 세자를 위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이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하였다. 사실 그 누구도 세종이 아닌 이상, 확실한 것은 알 수는 없으나 세종의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태평성대로만 기억되던 세종시대?

세종대왕 초상화

사실은 백성들이 흙을 파먹을 정도로 피폐했었다. 세종 즉위 이후 1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된 가뭄에 백성은 배고픔에 신음하고 농업은 황폐해졌다. 이는 조선 국가 경제의 위기였다. 세종은 10여 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습니다. “농업을 살리고 백성을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세종은 우선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농사 경험이 풍부한 농민에게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고 없는지를 묻고, 이를 가려 중요한 점만 수집한다. 이를 토대로 낸 통계를 바탕으로 경험과 지식을 집대성한 ‘농사직설’을 편찬한다. 농사직설의 보급은 농업의 과학화와 농업생산력 증대에 이바지하게 된다. 직접 씨를 뿌려 재배하는 ‘직파법’에서 벼의 모종을 키운 후 논에 모를 옮겨 심고 재배하는 ‘이영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세종 후대에는 토지 1결(=1ha)당 300두(말)였던 수확량은 최고 1200두(말)로, 무려 네 배나 증가하게 된다.
가뭄도 그에겐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비를 내리게 할 방법이 없으니 “비가 언제 얼마큼 오는지 알 수는 없을까?” 이러한 여망이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탄생시키게 된다. 측우기의 발명은 조선에 획기적 변화를 끌어냈다.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하고, 지역별로 비가 많이 오거나 적게 내리는 시기 등 ‘통계’를 축적하니 강우량을 예상해 농업에 적용할 대비책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가 가능했다.
세종은 조세제도에도 관심을 가진다. 부자는 세금을 덜 내고 가난한 자는 더 내는 당시의 세법은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세제 개혁’을 단행한다. 세종은 고심 끝에 새로운 세법인 공법을 제시하고 백성의 지지를 받는 세제 개혁을 위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찬반 여론조사를 하게 된다. 5개월간의 여론조사 결과, 찬성 57%, 반대 42%가 나왔으나 세종은 생각보다 반대가 많다는 이유로 시행을 보류하다가 14년 만에 공법을 시행하게 된다. 공법시행 후 백성들의 조세 부담이 현저히 가벼워졌다. 토지 한 결당 세금이 30두(말)에서 최하 4두(말)로 내려진 것이다. 사실상 태평성대는 아니었지만, 세종은 자신의 시대를 조선 르네상스 시대로 이끌었다.

 

세종의 가정사와 육체의 한계
세종 대왕은 여러 업적을 남긴 왕이지만 가정사가 일반 사람의 기준으로 봐서는 행복 하지는 않았다. 장녀 정소 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초기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했다. 이후에는 소헌왕후 마저 승하하여 자식 셋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 되었다. 자식을 셋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이 어땠을까? 


이런 가정사의 문제를 혼자 이겨내며,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온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스스로 “체력이 달리니 생각이 이전처럼 주밀(周密: 허술하지 않고 세밀하다)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보인다.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 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에게 서무를 결재토록 해 왕에게 집중되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해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의 숨겨진 이야기는 필자 또한 처음 접한 사실들이 많다. 이 기사에서는 세종대왕의 업적보다는 인간적인 모습과 단점 등도 많이 다루고 있다. 그 이유가 기록으로 남은 명백한 업적과 성군으로서의 치적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글에는 약간의 부정적인 내용들이 있음에도 세종대왕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성군이며 우리 역사 속에 자랑스러운 위인이다. 다양한 업적 중에서도 "훈민정음"으로 일컬어 지는 한민족의 문자 창제가 세종대왕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다. 이 창제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천자문을 배우거나 로마자를 문자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 기술에서는 혼천의, 양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 최윤덕을 북방에 보내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을 확정하였다. 남으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는 군사적으로도 활발한 업적을 남겼다. 예술과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문학, 농업과 양잠, 지리, 의학 등의 각 분야의 서적을 직접 서술하거나 지원하여 편찬하였다. 그 외에도 외교 및 법전 정비에도 직접 참여 하는 등 쉴 새 없이 다방면에 많은 일들을 추진하고 국정에 이만큼 전념한 왕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이후에도 없어 보인다. 조선 초기의 안정적인 치세로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닦은 왕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세종대왕의 화려한 업적은 과학, 경제, 국방, 예술, 문화에 모두 걸쳐 있어 정말 진정한 현대의 언어로 소위 ‘엄친아’라고 볼 수 있겠다.
 

이번 세종 나신 날을 기념하여 모두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까지 자세히 알기 바라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서 기사를 쓰게 되었다. 어떤가? 우리가 역사 속에서 성군으로 받들고, 좋은 왕으로 추앙하는 인물도 단점이나 실패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 ‘이도’의 모습으로 태어나,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여러 가지 업무와 좋지 않은 가정사 안에서도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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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