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우리말 비빔밥(이건범)

'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 나서서 줄임말을 만든다고?

한글문화연대 2023. 5. 26. 11:23

올 3월 10일에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어문기자협회,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이 뜻을 모아 ‘우리말 약칭 제안 모임’을 꾸렸다. 국립국어원도 협의에 참여한다. 각 단체에서 추천한 연구위원들이 모여 4월 7일에 첫 회의를 열어 운영 방안을 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를 영문 이름 약칭인 ‘오이시디(OECD)’로 쓰는 일이 많은데, 이 대신 ‘경협기구’와 같이 우리말로 줄인 이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게 잘 먹힐 일인지, 아니면 욕 먹을 일인지 모르겠다. 무수한 줄임말 신조어 때문에 정신 사나워서 줄임말이라면 손사래치는 분이 많은데, 나서서 줄임말을 만들겠다니 말이다.

줄임말 문화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그 말뜻을 바로 알아채기 어려운 상태에서 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우선 소통이 어렵고 그 다음엔 내가 뭔가 뒤처지는 건가 싶어 주눅이 든다고 한다. 모르는 말이 등장할 때 누구나 흔히 겪는 사정이다. 그렇지만 이건 못 알아듣는 줄임말이 등장했을 때의 일이고, '기재부(기획재정부), 대입(대학입시), 경북(경상북도)'처럼 이미 알고 있는 줄임말이 나온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용어들이 줄임말이라는 자각도 별로 없으리라.

그러니 새로 나온 줄임말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말의 출현 횟수, 접촉 횟수, 사용 횟수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익숙해지면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자주 쓰는 말이라면 외국어건 상말이건 차별어건 혐오 표현이건 모두 정당하고 사용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살이의 변화가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피워갈지 고민하는 일은 여전히 쉽고 바른 소통을 꾀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젊은 세대가 주도하고 있는 줄임말 문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말을 줄여 쓰는 것이 좋으냐 안 좋으냐 하는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말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의미가 어렵고 낯선 말은 되도록 줄여 쓰지 않는 게 좋다. 말을 줄여 빠르고 간단하게 전달하려는 ‘경제성’과 말이 길더라도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려는 ‘소통성’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는데,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 수는 없다.

말을 줄이려는 욕구나 말을 줄여 새말을 만드는 방법은 매우 오래된 언어 사용법이고, 여러 가지 현상과 개념과 기술과 느낌이 얽히고설켜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새로운 것들을 표현하는 데에 말 줄임은 불가피한 것 같다. 사실, 30년 전에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우심깜뽀하(우리 심심한데 깜깜한 데 가서 뽀뽀나 하까?)와 같은 줄임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약칭, 약어, 은어 차원에서 수많은 줄임말이 사용되었다. 요즘의 세태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의 압축 정도와 사용 빈도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지막지하다. 이런 말 줄임 현상이 아직은 비공식적인 영역에서 득세하고 있지만, 언젠가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공식 영역의 언어를 좌우하게 될 가까운 미래에 공식 영역, 공공언어 영역에서도 좀 더 깊이 들어올 거라고 본다. 지금도 윤핵관, 검수완박 등 정치권의 공식 언어에서 줄임말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넓게 보자면 전 세계적으로도 줄임말 문화는 하나의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 아닌가 싶다. CPTPP, IPEF, FOMC 등 도무지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국제기구의 로마자 약칭이 국제무대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아무런 거름 장치 없이 그냥 쓰인다. 이런 말들 앞에는 ‘줄임말’이라는 장벽과 ‘외국글자’라는 두 개의 장벽이 서 있다. 서너 개의 외국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의 머리글자만 딴 이런 약칭을 앞에 놓고 그 정체를 추측하기란 첩보영화에 나오는 암호 해독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지면이나 화면의 제약, 시간의 제약 때문에 줄일 수 있는 무엇이든 줄이려 한다. 이런 태도는 언론에 주의를 기울이는 공무원이나 기업에도 영향을 준다. 처음에는 온 이름을 쓰고 괄호 속에 로마자 약칭을 병기한 뒤 본문에서는 약칭을 쓰다가, 조금 지나면 처음부터 약칭만 사용한다. 특히 방송 보도가 그렇다. 이런 로마자 약칭 대신 쓸 우리말 약칭이라도 개발해야 하는 게 그나마 공식 언어 영역에서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로 ‘유엔’, 또는 ‘UN’이라고 사용하는 ‘국제연합’을 부를 때 일본에서는 ‘국련’이라고 줄여 부른다. 중국에서는 ‘나토, NATO’라고 우리가 주로 부르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줄여서 ‘북약’이라고 부른다. 우리 언론에서도 미국의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미 연방준비제도’를 ‘FRB, FED’로 쓰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요즘은 ‘미 연준’으로 줄여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로마자 약칭으로 부르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처음엔 이상하고 어설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신문과 방송에서 ‘미 연방준비제도’를 언급한 뒤에 ‘미 연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미 연방준비제도’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잇고, 그리하여 ‘미 연준’을 들으면 그것이 미국 어떤 연방 기구의 하나라는 추측이 시작되어 그 다음에는 이를 일치시킬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적어도 ‘아이피이에프(IPEF)’’와 ‘인태경협구상’ 가운데 ‘인도태평양경제협력구상’이라는 온 이름으로 접근해 가는 데에 어느 것이 더 유리할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줄임말 문화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진정시킬 건 진정시키고 좀 더 모호함을 줄일 수 있는 건 줄이는 게 필요하다.

* 이 글은 한글학회 <한글새소식>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