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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기] [세종나신날 기획3]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 세종의 소통을 향한 열망 - 문성진, 박규태, 이준학

한글문화연대 2025. 6. 5. 11:36

[세종나신날 기획 3] 백성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세종의 소통을 향한 열망

 

한글문화연대 대학생기자단 12

문성진, 박규태, 이준학

 

세종대왕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의 삶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민본 사상을 내세운 군주였다. 그의 사상은 신문고의 부활,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 편찬과 같은 실제 정책과 제도 개혁으로 실현했다. 그러나 백성에게는 여전히 큰 장벽이 남아있었다. 바로 문자였다.

 

훈민정음 탄생의 배경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서로의 뜻을 온전히 전하고 이해하며 기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글을 쓸 수 없는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호소할 길이 막막했고,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도 힘들었다. 세종은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고, 이는 훈민정음해례본에 기록되어 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세종은 내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라는 뜻을 밝히며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이는 실용적 민본 사상이 문자라는 구체적 성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과학과 철학이 담긴 구조

이렇게 탄생한 훈민정음은 자음 17자와 모음 11, 28자였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기역)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니은)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떴다. 모음은 하늘()과 땅(), 사람()의 세 가지 기본 모양인 삼재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발음기관과 당시의 자연 철학을 함께 담아냈다. 그래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배우기 쉽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중국과 다른 자주적인 문자의 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는 애민 정신의 발현이었다.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은 1443(세종 25)에 창제되어 3년 뒤인 1446(세종 28)에 반포되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은 이 문자는 세종대왕이 직접 주도하여 창제한 문자이다. 그리고 집현전 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하여 사용법을 정리했다.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세종의 명으로 집필한 훈민정음해례본1446년에 함께 세상에 나왔다. 이 해례본 서문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이면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고 언급하며 훈민정음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실용적이며 바른 소리를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교화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지식과 문화의 장벽을 부수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백성들이 문자를 통해 자유롭게 소통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세종의 민본 사상이 빚어낸 위대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문자는 소수 지배층의 특권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보급은 장벽을 무너뜨렸다. 유교, 불교 서적의 번역, 생활 정보가 담긴 실용서와 교화서의 등이 훈민정음으로 제작되어 지식 접근의 평등을 넓히고 민족 문화 발전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말할 권리의 뿌리,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단지 문자의 발명이 아니었다. 세종대왕이 펼친 백성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지식을 나누며,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로 이어졌다.

 

515일 세종대왕 나신 날 행사에서 한글문화연대는 시민들과 함께 훈민정음 서문 탁본 체험 행사를 운영했다. 시민들은 세종의 바람을 직접 손으로 찍어내며 그 뜻을 되새겼다. 그리고 이날이 공식 기념일로 지정되기까지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세종의 정신과 한글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힘써온 한글문화연대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모두를 위한 문자라는 정신을 이어가는 일은 지금 우리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