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기] “말은 편해야 한다”...‘리드를 가져가고 있다’보다 ‘앞서고 있다’ - 13기 기자단 이수빈
“말은 편해야 한다”...‘리드를 가져가고 있다’보다 ‘앞서고 있다’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13기 이수빈 기자
“시조의 운율 감각이 배어 있는 우리말
장단음을 소홀히 하는 건 본질을 등한시하는 일”
“인공지능은 즉각성의 장점이 있지만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려워”
지난 6월 29일 서울 목동 에스비에스(SBS) 사옥에서 박 아나운서를 만났다. 오십여 분 동안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아나운서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언어 습관과 공공언어, 그리고 일상에서의 우리말 보존에 대한 자신의 철학 등을 풀어냈다. 언론인을 꿈꾸는 예비 언론인에 대한 조언도 들어볼 수 있었다. 그는 “결국은 사람 만나는 일이니, 인성이 좋아야 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아나운서를 꿈꾸게 된 계기가 있다면.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학교 방송국에서 활동하는 선배의 발음과 소리가 좋아서 충격을 받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능력을 키워두면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자연스레 학교 방송국에 들어갔고, 그러다 보니 길이 열렸다.”
-아나운서로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에 가기 싫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지금은 12시 뉴스를 하는데 보통 아침에 회사 체육관에서 운동한다. 방송에서 더 생동감 있고 활기찬 모습을 보이기 위해 습관화했다. 12시가 되면 뉴스를 진행하고, 오후에는 라디오 뉴스가 배당되면 시간을 철저히 지키며 4분 혹은 20분 원고를 읽는다. 매 방송이 끝나면 일종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느껴진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매일 나 자신을 입증하는 시간을 갖게 되니까 만족도와 행복감이 있는 직업이다.”
-일상생활 속 직업병이나 언어 습관이 있다면.
“사람들의 발음을 귀 기울여 듣게 됐다. 누군가의 발음이 좋으면 다시 보고, 좋지 않아도 보게 된다. 말하는 억양에서 사투리가 느껴지는 분을 보면 그분이나 부모님의 고향을 알 수도 있다. 틀린 발음을 사용하는 경우를 봐도 혼자 느끼고 ‘그렇구나’ 한다. 장단음도 많이 들린다. 타 방송사에서 보도할 때 장음과 단음을 구분하지 않는 아나운서가 있다. 정상회담 같은 경우에도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할 때처럼 길게 발음하면 대통령 간의 회담이 아니라 정상인 사람들의 회담이 된다.”
-일상에서 장단음 구분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장단음 체계가 앞으로도 이어질까.
“지금도 여러 음운 체계가 힘을 겨루고 있다. 히읗 발음이 점차 사라지고 있고, 젊은 세대에서는 ‘오’와 ‘우’의 구분도 흐려지고 있다. 이렇게 음가가 변하면서 발음이 혼용되는 추세를 보면 장단음도 100년쯤 뒤에는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운율 감각이 디엔에이(DNA)처럼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원고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시조의 3·4·3·4 운율은 따로 연습하지 않아도 큰 어려움 없이 읽는다. 노랫말을 써 봐도 시조의 운율 체계와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우리 조상 때부터 이어져 온 운율 체계가 몸에 배어 있다. 장단음 역시 없어질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매우 희박하다고 본다. 발음 자체는 시대에 따라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ㆍ(아래아)’ 처럼 다른 소리로 바뀌어 없어진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음의 길이를 구별하는 감각까지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우리말을 쓰는 한 장단음은 여전히 중요하다. 한글은 우리말을 적는 문자일 뿐, 사람은 문자를 배우기 전에 말을 먼저 한다. 그런 점에서 장단음을 소홀히 하는 것은 우리말의 본질을 등한시하는 일로 비칠 수 있다.”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우리말에는 장단음이 있고, 한자어에도 장단음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말 어휘 가운데 한자어에서 유래한 말이 많기 때문에 한자를 알면 단어의 뜻과 쓰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어도 여러 언어를 받아들이며 발전했듯, 언어의 기원을 알면 언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한자어를 완전히 떼어 놓고 우리말을 쓰기는 어렵다. 우리말을 아끼고 가꾸자는 취지에는 공감한다. 다만 우리말을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졸부'를 '졸라 부자'의 줄임말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벼락부자' 라는 표현이 있지만, '부자' 역시 한자어다. 이런 사례를 보면 단어의 유래를 아는 것이 어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자를 중국의 글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생활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언어문화의 한 요소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
-방송 업계에서 사용되는 공공언어를 어떻게 보는가.
“중계방송에서 흔히 쓰는 ‘리드를 가져가고 있다’는 영어식 표현이다. 그냥 ‘앞서고 있다’라고 하면 된다. ‘제가 먹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먹어보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좋다. 말은 편해야 한다. 다만 외국어나 신조어를 우리말로 무리하게 바꾸는 데에는 반대한다. 억지로 만든 표현이 항상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탑재하다’도 썩 좋은 표현은 아니다. 인공지능이나 정보통신 분야에서는 새로운 용어가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그때마다 우리말을 새로 만들어 대응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지는 의문이다. 용어는 금세 사라지기도 한다. 오래 쓰이는 말이라면 결국 우리 언어 환경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하고 정착할 것이다. 새로운 용어는 무조건 우리말로 바꾸기보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며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특히 뉴스는 어려운 용어를 부연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블록체인’ 같은 용어도 억지로 우리말로 바꾸기보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26년의 아나운서란.
“아나운서라는 말 그 자체다. 시대에 따라 아나운서가 모두 달랐듯, 지금 사람들이 떠올리는 모습 역시 2026년의 아나운서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만든 기술이다. 사람이 만든 것으로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쉽지 않다고 본다. 사람만이 가진 정의감과 도덕성, 개성 같은 고유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공지능이 그런 역할까지 대신한다면, 특정 조직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관점을 검토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게이트키핑(기자나 편집자와 같은 뉴스 결정권자가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일)이 생략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문제다. 현실적으로는 속보 체제에서 인공지능 시스템만 갖춰져 있으면 원고와 영상만으로 즉시 뉴스를 내보낼 수 있다. 사람은 분장과 의상 등 방송 준비 과정이 필요하지만, 인공지능은 즉각성이라는 강점이 있다. 다만 그런 시스템이 모든 방송을 대신하게 될지는 별개의 문제다. 시청자들도 사람이 전하는 뉴스의 가치와 역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아나운서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예비 언론인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준비 과정에서는 역량을 상당히 중시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역량이 뛰어나도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언론인은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봤으면 한다. 좋은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고, 모르는 사람과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부분은 면접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최근 홍명보 감독이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에 힘을 주고 나갔다. 사람들은 말보다 그런 태도에 더 큰 반응을 보였다. 결국 사람은 말뿐 아니라 태도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