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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세종의 ‘언어 인권 정신’을 이어가자 25.10.01

한글문화연대 2025. 10. 1. 12:12

 

세종의 ‘언어 인권 정신’을 이어가자

 

 

 

새 정부가 최근 123대 국정 과제를 발표했다. 우리말과 한글의 보존 및 발전에 관한 정책이 없어 아쉽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과제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정 과제 명칭과 설명에 한글과 우리말 대신 외국 문자와 외국어가 넘쳐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하다. AI, R&D, RE100, ODA 등 수많은 로마자 약어는 물론이고 넥스트, 모빌리티, 컬처, 인프라, 포렌식, 거버넌스처럼 영어로 바꿔 사용한 용어도 많다.

 

새 정부 국정과제에 외국어 넘쳐
세종은 애민정신으로 한글 창제
외국어 남용하면 알권리 침해

 

문자를 포함해 개인의 사적인 언어생활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할 까닭은 없다. 혐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말이 아니라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니까. 그렇지만 정부와 언론이 사용하는 공공 언어는 공공성이 우선이다. 특히 정부 공문서는 국민이 알기 쉬운 단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작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국어기본법에서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공공 언어는 국민의 안전과 재산, 기본권과 의무, 행복 추구의 길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다.

공문서에서 한자를 혼용해야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2012년에 국어기본법의 공문서 한글 전용 규정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심판을 청구했다. 2016년 헌재는 전원 일치로 이 규정이 합헌이라고 결론 냈다.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한글로 공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르면 영문 로마자 혼용도 국어기본법 위반이다.

세종대왕이 1443년 한글을 창제한 동기는 애민정신이다. 백성이 제 뜻을 펼 수 있도록 익히기 쉬운 문자를 만든 세종의 애민정신은 오늘날 언어 인권 정신으로 이어진다. 정보 접근에 장벽을 없애 기초적인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국민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고 공론장에 참여해 자기 뜻을 밝힐 수 있다. 이는 공공 언어에서 쉬운 우리말을 한글로 적을 때 가장 충실하게 구현된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국민의 언어 인권을 보장하고 행정 비용을 줄이며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쉬운 언어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지난 6·3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가 ‘K이니셔티브’라는 공약 구호를 내걸었을 때 필자는 이니셔티브라는 단어를 일반 국민 중에 16.4%밖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를 갈라 국민 통합을 방해하며, 국어 발전을 저해하니 문화국가 원리에도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어려운 말과 글은 어떤 국민에겐 너무 높은 장벽이다. 특히 공공 언어에서 외국어를 사용하면 외국어 능력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이후에는 쉬운 우리말 사용에 관심을 쏟는 듯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증거 열람을 보장하는 제도를 꼭 ‘디스커버리 제도’라고 해야 하느냐며 새 말을 찾아보라고 지시했고, 용어 사용에도 신중해진 듯하다. 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이니셔티브’라는 단어가 새 정부 최상위 공문서인 123대 국정 과제 문서에 다시 ‘글로벌 AI 이니셔티브’ 등으로 등장했다. 이 대통령의 최근 유엔 연설에서도 ‘이니셔티브’라는 말을 썼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와 광복절 경축사, 취임 100일 기자회견 등에서 ‘AI’ 대신 ‘인공지능’이라고만 말했지만, 측근과 언론에서 ‘AI’라고 한다. 그러니 유엔 연설에서도 ‘AI’가 튀어나온다.

한자의 시대는 지났다지만, 이제 영문 로마자를 남발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알권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 한자가 가득한 국한문 혼용 공문서와 신문을 마주한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답답하겠나. 그렇듯이 정부 정책과 언론 보도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영어 단어와 로마자를 마주하는 국민 중에 답답함과 좌절까지 맛보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을 수 있다.

민주공화국은 생각이나 재산, 연령이나 학력이 다르더라도 모든 국민이 공동선을 향해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국민주권 정부’를 표방한 새 정부에서 국민이 주인 되고 하나로 통합된 민주공화국을 이룩하려면 말부터 그렇게 써야 한다. 한국어가 공용어인 나라에서 영어는 아무리 쉬운 단어라도 우리말보다 쉽지 않다. 쉬운 우리말과 한글을 쓰자. 언어는 인권이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7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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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한글의 보존 및 발전에 관한 정책이 없어 아쉽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과제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정 과제 명칭과 설명에 한글과 우리말 대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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