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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기억에 대하여

by 한글문화연대 2014. 5. 8.

[우리 나라 좋은 나라-31] 김영명 공동대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꼭 맞는 말도 아니다. 동시에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두 말 모두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못된 기억은 사라지기도 해서 삶이 너무 힘겹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기억의 동물이라도 한 것은 그냥 내가 한 말인데, 일단 기억이 있으니 망각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만고의 진리 말씀이고, 동시에 아무 의미 없는 말씀이다


오래 전 미국에서 유학할 때 여름 방학 한 달 동안 어떤 동료 유학생 하고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귀국한 뒤 다른 동료 유학생 출신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그 학생 얘길 하는데, 나는 도무지 같이 산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귀국한 지 꽤 오래 지난 다음에 가까이 지내던 유학생 두엇을 만나기로 하였는데, 시간이 좀 남아 음식점 뜰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웬 여자가 나한테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아, 이 놈의 인기란... 하는데, 그 여자는 나를 아주 잘 아는 듯이 행동하였다. 나는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친하게 지내던 유학생의 부인이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내 딸은 고등학교 시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야 하겠냐만 별로 생각나지 않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내가 동지를 하나 얻었는가 아니면 부전여전인가.


내 아들이 군대 가고 제대하고 외국 연수 가고 한 것을 연도별로 기억해 보려고 종이에 적어보기도 하였다. 밤 늦게 들어온다고 야단 친 것이 몇 살 때까지였는지 기억하려고 역시 종이에 정리해 본 적도 있었다. 정작 본인은 그런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데...


그러다가 깨달았다. 이런 소소한 일상을 안 잊으려고 그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려고 하는 짓이야말로 정신 건강상 백해무익한 일이라고... 과거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 다른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 순서대로 알아서 도대체 무엇 하려는가? 하나의 강박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것을 잘 기억하고 어떤 것을 잘 잊어버릴까? 물론 중요한 사건은 잘 기억하고 소소한 반복 일상은 잘 잊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는 것 같다. 어떤 일이나 이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도 기억에 남아 있고, 어떤 일은 위 내 멍청한 망각처럼 꽤 비중 있는 일인데도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고등학생이었던 내 처 조카가 자기 집에서 사기 잔에 물을 따라 먹던 모습이 심심하면 떠오른다. 내게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그 녀석과 친하지도 않았고, 그 모습이 특이하지도 않았고, 한 마디로 기억에 남을 일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왜 그 모습은 종종 떠오르고, 누구와 한 달 동안 같이 산 일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을까? 뇌 과학은 이에 대한 대답이 있을까?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그 사실 자체를 잊어먹기도 한단다.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일까? 나는 그런 충격을 받은 일이 없다. 그래서 중요도의 순서대로 기억과 망각의 대상이 일렬로 정렬해야 할 것 같은데, 내 골은 아마 그렇지 않은가 보다. 다른 사람의 골도 마찬가지리라.


개인의 기억 뿐 아니라 집단의 기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은 서해 페리호 참사와 대구 지하철 참사를 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큰 충격이어서 우리는 기억을 아예 지워버렸을까? 그런 것은 아닐테고, 그냥 우리가 아직 한심한 수준이라 과거의 잘못을 잊어버린 게다


어쨌든 기억과 망각의 구조는 질서정연하게 짜여진 것 같지 않다. 짜여진 구조는 있으되 제법 들쑥날쑥한 게 아닌가 한다. 전문가의 의견이 궁금하지만, 그 전문가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모르겠고, 이 일은 내일이면 잊어먹으리라. 그러다 언젠가 다시 불쑥 내 기억의 창을 뚫고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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