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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영상용어,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나/전문용어 특집 ① - 김선미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17. 10. 13.

영상용어,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나
- 전문용어 특집 ①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4기 김선미 기자
sunmi_119@naver.com


“레디, 액션!”
한 남자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 남자의 직업은 무엇일까? 대부분 감독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번엔 ‘준비, 시작!’이라고 외치는 남자를 상상해보자. 선뜻 그의 직업이 감독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레디’와 ‘액션’이었을까. ‘준비’와 ‘시작’은 왜 사용되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를 찾으려면 우선 대중매체의 변화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불과 몇십 년 만에 대중들이 선호하는 매체가 종이에서 전자기기로 바뀌면서 정보를 기록하는 방법도 글에서 영상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이에 따라 방송영상과 영상학의 관심은 높아져 갔고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상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영상학의 빠른 유입으로 인해 영상용어에 대한 충분한 국어순화과정 없이 수용한 것이 문제였다. 영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순화되지 않은 외래어들을 익혀야만 했다.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영상은 더 많은 관심을 받았고, 영상용어는 널리 퍼져갔다. 그리고 결국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단어들이 순화되지 않은 채로 사용되는 것이다.

 

▲ 영상 전문용어 중에서

 

어떤 용어들이 사용되나

그렇다면 실제 영상학 수업에서는 얼마나 많은 외래어가 사용되고 있을까? 위의 표를 보자. 표에 있는 모든 단어는 영상을 공부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익혀야만 하는 말이다. 샷(Shot)이나 앵글(Angle)처럼 널리 쓰여서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도 있고, 틸팅(Tilting), 패닝(Panning)과 같은 생소한 단어들도 보인다. 중요한 점은 이 표에서 한국어로 순화된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트래킹(레일 위에 촬영기를 싣고 이동하면서 촬영하는 장면)처럼 우리말로 풀어쓰기에는 길고 어려운 단어도 있지만, 샷(장면), 앵글(각도), 무빙(움직임)과 같이 쉽게 풀어쓸 수 있는 단어도 여럿 있다. 게다가 표에서 나타난 단어들은 영상학 수업이나 촬영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 수준이다. 실제 사용하는 영상전문용어로는 내러티브(narrative), 시퀀스(sequence), 디졸브(dissolve), 플래시백(flashback)등 일반인이 쉽게 짐작하지 못하는 단어가 많다.

 

전공생도 어려운 전문용어, 일반인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영상을 배우는 학생들조차도 전문용어를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현재 영상학과에 재학 중인 최현아(22. 대학생) 씨에게 수업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모두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자 “정확한 뜻은 설명할 수 없어도 대충 감으로 맞추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3년 동안 영상만 배웠지만, 아직도 교수님이 전문용어를 말할 때 헷갈리는 부분이 많다. 사실 얼마 전에 뉴스에서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접했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인터넷에 검색해봤다.”고 말했다. 또한 이서현(21. 대학생) 씨는 “풀어쓰기 어려운 말이면 몰라도, 충분히 한국어로 쓸 수 있는 말도 외국어로 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디졸브는 화면합성으로, 플래시백은 회상으로 쉽게 번역할 수 있는데도 모두 어려운 말만 쓴다.”고 말했다.

 

▲ 기사에 쓰인 전문용어

 

놀라운 것은 이처럼 전공생도 어려워하는 단어들이 버젓이 방송과 뉴스에 사용된다는 점이다. 영화감독과 배우가 기자회견이나 인터뷰에서 전문용어를 사용했을 때 기사에 어떠한 순화나 풀어쓰기 없이 그대로 일반인에게 노출되고 있다. 심지어 방송에서 전문용어인 신(scene)과 순수 외국어인 스틸러(stealer)를 합쳐서 주연 못지않은 조연을 지칭하는 말로 ‘신스틸러’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순화 위해 모두 노력해야
전문용어를 전문가끼리 사용할 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전문용어들이 무분별하게 일반인에게 노출되면 지식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격차가 생길 우려가 있다. 이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용빈도가 낮거나 순화가 어려운 전문용어는 그대로 유지하되, 일반인에게 노출이 잦은 전문용어는 순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페르소나를 ‘분신’으로, 오마주를 ‘인용’으로, 메소드를 ‘몰입’으로 순화한다면 용어의 원래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일반인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문용어를 순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첫 번째로 전문가와 지식인이 스스로 자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외국어나 어려운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할 때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잘못된 허영심을 떨쳐야 한다. 이러한 허영심으로 인해 외국어나 어려운 전문용어가 자정 없이 계속 사용된다면 어려운 말이 쉬운 말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는 인식을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비에스(SBS) 예능 「런닝맨」의 한 장면

두 번째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용어를 순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리고 여러 기관에서 사용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한 사람 또는 한 기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과 인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용어 순화에 대한 정부의 충분한 지원과 노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는 매체와 국민의 노력이 필요하다. 매체가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할 때, 자정 없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보에 접근하는 데 큰 벽이 생기는 것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매체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지식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민들 또한 어떤 정보를 받아들일 때 지나치게 전문용어나 외국어가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지, 무의식중에 ‘있어 보이기’ 위해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한편 지난 4월 한글문화연대는 19대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각 당의 대통령 후보에게 쉬운 전문용어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어달라고 요구했다. 전문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어 국민에게 알 권리를 보장하고 학문과 기술의 발전 및 한국어를 풍부화를 꾀하기 위해서였다. 한글문화연대는 오랜 기간 “한글은 인권이다”라는 주장과 함께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한자와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활동을 해왔다. 행정안전부는 이러한 뜻을 받들어 8월 22일 어려운 안전용어 42개를 알기 쉬운 용어로 순화한다고 밝혔다. 전문용어 순화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기울이는 작은 관심과 노력이 우리말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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