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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말 비빔밥(이건범)

로봇에게나 할 말을?

by 한글문화연대 2018. 7. 12.

[한국방송작가협회-방송작가 2018년 7월호]에 실린 글

 

오늘은 우리말의 밑바닥에 깔린 뒤틀림을 살펴보련다. 누구나 병원에 가면 바깥 세상에서는 잘 안 쓰는 요상한 말투를 경험한다.
“이건범 님, 주사실 앞에서 기다리실게요.”
“아, 네.”
“이건범 님, 들어오실게요. 바지 약간 내리실게요.”
‘기다리세요, 들어오세요, 내리세요’ 대신 쓰는 ‘기다리실게요, 들어오실게요, 내리실게요’는 이제 병원을 넘어서 미용실, 손톱손질가게 등 손님과 일하는 이가 가까이 접촉하는 모든 업종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한때 <개그 콘서트>에서 이 말투를 가지고 노는 바람에 더 심해졌다. 언뜻 들으면 공손하게 부탁하는 말 같기도 하고, 나한테 요구하는 건지 자신이 하겠다고 하는 건지 뒤엉킨 것 같아 앞말에만 의지하여 해석하는 말들.

 

 ‘-ㄹ게,  -을게’는 어떤 행동에 대한 약속이나 의지를 나타내는 종결어미로, “곧 돌아올게. 내가 먼저 먹을게.”처럼 쓴다. 여기에 해요체 종결어미 ‘~요’가 붙어서 존대를 표현한다. 말하는 이의 약속이나 의지를 밝힐 때 쓰는 말이니 듣는 상대에게 명령이나 요청을 할 때 ‘-게요’를 붙이면 문맥이 꼬인다. 가끔은 듣는 이가 말하는 이의 의지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로봇인가 하는 불쾌감이 든다. 그런데 특히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이 말투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주사를 놓기 전에 “약간 따끔하실게요.”라고 말하니, 반드시 아파야 한다는 건지 무언지 허탈할 지경이다.

 

남에게 말할 때 ‘~게요’를 붙여도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도 있기는 하다.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안내를 하거나 할 때. 말하는 이가 전체 무리의 일원이기도 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지시나 설명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무리 전체를 내 한 몸처럼 여기면서 “자, 이제 저리로 가겠습니다.”하는 말을 해요체로 “자, 이제 저리로 갈게요.”라고 했을 수 있다. 자신의 의지 표명이자 함께 해야 할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말이니 씀직하다. 이런 말투가 상황에 관계없이 공공 영역에서 잘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존대를 표현하는 ‘시’까지 넣어 마구 쓰이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병원체 말투는 거북하기도 하지만, 전달하려는 뜻이 다른 경우들을 헷갈리게 한다. 예를 들어 “환자분은 조금 있다가 저녁 식사 드실게요.”라고 했다면, 이 말은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환자분은 조금 있다가 저녁 식사를 드시게 될 겁니다. 둘째, 환자분은 조금 있다가 저녁 식사 드시는 편이 좋습니다. 셋째, 환자분은 조금 있다가 저녁 식사 드세요. 만일 첫째 의미로 ‘드실게요’를 사용했다면 가까운 미래의 일정을 알려준 것이고, 둘째 의미라면 어떤 선택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준 것이고, 마지막 의미라면 가벼운 지시를 한 셈이다. 모호하다.

 

어떤 사람은 그리 말한다. 언어는 생물과 같아서 누가 제멋대로 고치려고 규제하려 한다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즉, 규범에 맞춰 말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란 대개 헛된 짓이라는 이야기이다. 인터넷에서 대표적인 우리말 파괴로 꼽히는 ‘하삼’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문장을 ‘ㅁ’으로 맺는 말투는 120년 전 <독립신문>에도 나타나는데, ‘하세요’를 귀엽게 표현하려고 'ㅁ'을 붙여서 '하세욤, 하세염'이라고 적다가, 이것을 더 줄여 '하셈'으로 쓰고, 타자의 편의성과 독특한 표현 욕구 때문에 ’하삼(하3)‘으로 쓰더니 대세로 굳었다. 용비어천가에는 ’나모‘라고 나오던 게 지금은 ’나무‘로, 어느 지방에서는 ’낭구‘로 말하듯이,  발음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바뀔 수 있으므로 그 표기도 바뀔 수 있다. ’예쁘다‘와 함께 ’이쁘다‘를 복수 표준어로 정한 건 이런 사정에 해당한다. ’하삼‘도 세력이 커지면 언젠가 표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발음과 표기의 변화가 아니라 어떤 문법 요소의 기능이 바뀌는 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법을 가지고 논한다면 발음이나 표기가 바뀌는 건 법 조문의 일부를 이리저리 다듬고 다른 법과 맺는 관계에서 범위나 위상을 손질하는 일과 비슷하다. 하지만 문법 기능을 바꾸는 건 법을 폐지하는 일에 버금간다. 그 법이 맡았던 기능이 불필요해졌거나 시대 정신에 뒤처져서 걸리적거리기 때문에 법을 없애는 것 아니겠는가? 호주제, 간통죄, 야간 시위 금지 조항이 사라진 건 다 이런 이유에서다. 부정적인 지나침을 뜻하던 부사 ’너무‘를 ’너무 좋다‘고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한 게 이런 사정에 해당한다.

 

낡은 법이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가, 법의 허약함과 혼란이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가, 이 두 가지 늘 대립하는 질문은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고,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언어의 변화를 모두 자연스러운 것으로만 받아들이면서 이를 지키려는 노력을 헛되다고 볼 양이면 교육이 다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문법을 파괴하면서까지 ’하세요‘를 버리고 ’하실게요‘를 써야 할 정도로 ’하세요‘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오늘 우산을 가지고 나갈까?” 만일 병원체 말투를 그대로 놔둔다면 말뭉치 기반으로 언어를 인식하고 대답하는 인공지능 로봇도 이렇게 받아칠지 모른다. “비 올 테니 가지고 가실게요.” 이쯤되면 누가 로봇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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