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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오직 노래 한 길이 남아, 청구영언 - 남재윤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17. 7. 28.

오직 노래 한 길이 남아, 청구영언

 – 2017년 서울에서 듣는 우리 조상의 노랫말 [2]


한글문화연대 대학생기자단 4기 남재윤 기자

pat0517@naver.com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누구나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한 번 즈음은 들어 본 적이 있을 황진이의 시조이다. 이를 비롯해서 ‘하여가’, ‘단심가’, ‘댁들아 동난지이 사오’, ‘개를 여남은이나 기르되’ 등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많은 시조의 출처가 청구영언이다.

 

구영언은 1728년 전문 가객 김천택이 편찬한 한글 가집으로, 현재까지 전해오는 170여 종의 가집 중 편찬 시기가 가장 이르며 총 580수의 작품을 수록했다.

 

김천택의 자는 백함(伯涵), 호는 남파(南坡)이다. 해동가요에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고 소개되어 있으나, 관직 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구영언에 자신의 시를 ‘여항육인’ 항목에 넣은 것을 보면, 김천택은 여항, 즉 시정 골목에 살던 계층으로 보인다.

 

이런 김천택과 같이 전문적으로 노래를 짓고 부르는 ‘전문 가객’은 17세기 말 전후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서울(한양)에 거주하던 중인, 서리층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지식과 경제적 부를 배경으로 하여 18세기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시정 문화의 실세로 부상했다. 이들의 경제적 부가 문화 부분에 투입되면서, 전문 가객의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사대부가 독점적으로 향유하던 시조의 창작과 전승, 가객들의 모임인 가단 결성, 시조집 편찬 등의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전문 가단은 동질적인 의식을 지닌 전문적 예술가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 국립한글박물관 청구영언 전시에서 공개된 청구영언 원본


둥글껄껄 껄껄둥글

청구영언에는 우리말과 한글의 미학을 담은 시어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 중 기자의 마음에 와 닿은 시어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둥글껄껄 껄껄둥글’
‘곰비님비 님비곰비’
‘지는 잎 부는 바람에’
‘인생이 가련하다 물 위의 부평초같이’
‘사랑사랑 긴긴사랑 개천같이 내내사랑’
‘귀뚜리 저 귀뚜리 가엾다 저 귀뚜리’
‘나약하고 놀라운 건 가을 하늘의 기러기로다’


‘날 보고 방긋 웃는 모양은 삼색 복사꽃 미처 피지 못한 것이 하룻밤 빗기운에 반만 절로 핀 모습이로다’

김천택은 당시 음란하고 저속하다고 평가받던 시정의 노래들도 버리지 않고 모아서 총 116수를 청구영언 ‘만횡청류’ 항목에 실었다. 이 ‘만횡청류’는 ‘능청능청 부르는 노래들을 모은 악곡’이라는 뜻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전시에는 ‘빨간 방’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빨간 방에 들어가기 전에 ‘뜨거운 사랑과 욕망의 노랫말들이 모여 있는 공간입니다. 청소년과 아이들을 인솔하는 부모님과 선생님께서는 각별히 신경 써주세요.’라고 쓴 안내문이 보였다. 빨간 벽에 여러 작품이 걸려 있으며, 거울 벽에는 빨간 글씨로 시조들이 쓰여 있었다. 그중 가장 정숙한 시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이려뇨 어이려노 시어머님 어이러뇨 / 소대남진의 밥을 담다가 놋주걱 잘눌 브르쳐시니 이를 어이려뇨 시어머님아 / 저 아기 하 걱정마라스라 우리도 젊었을 적 여러흘 부르쳐 보았네
- [해석] 어찌하나요 어찌하나요 시어머님 어찌하나요 / 샛서방 밥을 담다가 놋주걱 자루를 부러뜨려 버렸으니 이를 어찌하나요 시어머님아 / 저 아기 많이 걱정 말아라 우리도 젊었을 때 여러 개 부러뜨려 버렸네

 

샛서방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내연남이다. 어느 부인이 이 샛서방 밥을 담다가 놋주걱을 부러뜨렸는데, 이를 시어머니에게 말한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이 부인을 혼내기는커녕, 자신도 과거에 많이 부러뜨렸다고 말한다. 이 시조는 가장 정숙한 편에 속한다. 다른 시조들은 ‘빨간 시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음란하다는 이유로 음지에 있던 사설시조가 공적시조가 공적 담론의 장에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전문 가단의 결성에서 비롯되었다. 가집을 편찬하면서 시정의 투박한 언어, 음란한 언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가집의 수집과 수록은 전문 가단이 시정의 언어, 기층과의 소통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조의 창작과 전승에는 ‘후원자’의 뒷받침이 있었다. 이에 관하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애경 교수를 인터뷰했다.

 

"전문 가단과 가집 활동을 보면, 이들이 물질적·이론적으로 후원한 ‘후원자’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구영언에는 서문을 쓴 정래교, 발문을 쓴 마악노초 이정섭이라는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후원자의 계층은 서울에 사는 명문 가문의 양반부터 중인 출신의 부호, 문인들까지 다양했습니다. 18세기 이후 이들의 후원을 바탕으로 시조가 사대부의 미학을 독점적, 배타적으로 담아내던 것에서 벗어나 시정의 언어를 수용하면서 신분적 기반을 이탈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조는 처음에 오직 양반들이 향유하는 문화였다. 하지만 전문가객의 출현과 후원자의 지원으로, 민간에까지 퍼지게 되었고 재치 있고 아름다운 시어와 시조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우리말 시조들이 한글로 기록되었다는 것에서, 당시 사람들이 시조 문화를 향유하는 데 있어 한글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어와 시조들을 담은 청구영언의 원본이 국립한글박물관에서 9월 3일까지 공개된다. 입장료는 무료이니 원본을 비롯하여 시어 전시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기자가 청구영언과 그 전시를 보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 시조를 소개하면서 기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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