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민주화,이렇게 추진해 보자.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1. 호칭 민주화가 필요한 사정
누구든 일터나 학교에서, 공공장소에서, 가게와 식당 같은 영업 장소에서, 동아리나 동호회 따위 사교 모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말을 건네기 위해 그들을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름만 부르는 건 낮잡아 보는 짓이라고 여기는 반면에 고민 없이 부를 수 있는 호칭이나 정교한 호칭 체계는 마땅치 않다. 그래서 호칭을 둘러싼 문제가 수없이 일어난다. 뭐라고 불리느냐에 따라 기분이 나쁘거나 할 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스스로 이러저러하게 불리길 기대하는 호칭과 다를 때이다.
옛날에는 신분과 나이에 따라 위아래 구별이 뚜렷했고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가 단순해서 그에 걸맞은 높임말투와 호칭을 사용하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크게 세 가지 사정이 달라졌고, 이 때문에 호칭 문제가 복잡해졌다.
첫째, 기업과 정부 기관, 병원과 학교 따위 공적인 사회 조직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가정을 벗어난 사회 생활에 거의 다 참여한다는 사정이다. 한 사람이 직장의 직원으로, 민원인으로, 손님이나 환자로 매우 다양한 공적 사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그 관계마다 호칭이 달라지는 것이다. 둘째, 여성과 미성년자 같은 약자의 권리, 개인의 존엄과 평등한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높아졌다는 사정이다. 나이가 어리거나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옛날처럼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도 그만큼 커졌다. 마지막으로, 가족 말고도 운동과 취미 따위로 만나는 비공식 모임이 크게 늘어났다는 사정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 덕에 이 사적 공간은 끝없이 확대되고 있고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관계 때문에 호칭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렇듯 세상이 달라지고 관계가 복잡해지다보니 어떨 때는 부를 말이 마땅치 않거나 불리는 말이 불편할 때가 있다. 호칭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대화나 사회 관계가 왜곡된다면 이는 사회적 갈등을 키우고 비용을 늘릴 뿐이므로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옛날처럼 위아래 줄을 명쾌하게 세우는 ’서열화‘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 가능하지도 않다. 호칭에서도 ’민주화‘가 필요한 것이다.
호칭 민주화에서 관건은 ‘나이’와 ‘지위’와 ‘남녀’의 차이를 얼마나 좁힐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사회적 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차별을 무색하게 만드는 호칭 문화를 뿌리내리는 일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갑을 권력 관계라고 여기던 질서가 뒤집히는 일이 이제는 보편적인 상황이 되었음도 고려해야 한다. 나이 많은 남자 윗사람과 나이 어린 여자 아랫사람이 과거의 전형적인 갑을 권력 관계였다면, 나이 어린 여자 윗사람과 나이 많은 남자 아랫사람, 나이 어린 남자 윗사람과 나이 많은 여자 아랫사람, 나이 어린 여자와 나이 많은 남자 동료 따위 새로운 관계들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보편적인 모습이다. 호칭의 민주화는 이들의 대화와 관계의 민주화를 촉진할 것이다.
물론 호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제들을 한꺼번에 다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 문화의 민주화는 제도의 민주화와 달리 단칼에 이뤄지지 않는다. 문제 상황 가운데 우리가 가장 자주 만나는 상황, 거의 모두가 만나는 상황부터 하나씩 호칭의 민주화를 풀어가야 한다. 먼저, 어디에서 호칭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지 짚어보자.
2. 호칭 민주화가 필요한 영역
‘호칭’에서 문제가 되는 건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부르는 말이 구별되어 정해져 있다는 통념이다. 이 통념은 본인의 인정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다고 보이는 사람에게 어떻게 불릴지가 관건이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깡패라고, 특히 나이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잘한 다툼으로 말을 섞다가 엉켰을 때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합니까?”라고 하면 바로 험악한 답이 돌아온다. “뭐, 당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몇 살이야?” 이쯤 되면 멱살잡이 직전이니 뜯어말려야 한다. 이럴 때 ‘당신’은 누가 봐도 약간 아랫사람, 나이나 지위에서 나보다 약간 낮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너’라는 말 대신 막돼먹지 않은 말로 쓰는 호칭이다. 일상 대화나 부부 사이의 대화에서, 그리고 문어적인 표현에서는 ‘너’보다 훨씬 높여주는 말로 사용하는데 이상하게도 험악한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낮잡아 이르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어떤 호칭은 상황 맥락에 따라 나이와 지위에 걸맞다고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푸대접받고 있다고 느끼게도 한다. 그래서 이런 분쟁에서 벗어나고자 무조건 상대을 높이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는 마치 모든 서술어에 존대의 선어말어미 ‘-시-’를 마구 붙이는 모습과 비슷하다.
누구는 한 살 아래인데도 반말에 이름만 부르고, 누구는 다섯 살 아래임에도 존대말에 이름 뒤에도 ’~씨‘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이런 차이는 친분의 강도에 따라 일어난다. 친분이 강하면 겨우 한 살 위임에도 내게 반말을 하거나 이름만 부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친분이 약하다면 다섯 살 위일 경우라도 내게 반말로 이름만 부르는 건 어마어마한 무례이다.
결국, 호칭 문제는 부르는 자의 문제가 아니라 불리는 자의 문제다. 남이 자기를 부르는 호칭을 어찌 느끼느냐 하는 문제이다. 앞서 말해했이 인정 욕구와도 이어져 있다. 이는 어떤 이가 남과 맺는 관계가 친밀하고 유대감이 높은지 따위의 정서적인 친분 감정과, 그런 호칭을 사용하는 공간이나 조직의 성격이 공적인지 사적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공간에서 본인이 느끼는 친분 수준에 비해 푸대접받는 호칭으로 불린다면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친분의 정도와 관계의 성격에 따라 한 개인이 생활하는 영역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적 관계에서는 가족처럼 친분이 강한 영역과 사교 모임처럼 친분이 상대적으로 약한 영역이 있다. 공적 관게에서는 직장처럼 친분이 강한 영역과 공공시설이나 영업 장소처럼 친분이 전혀 없는 영역이 있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호칭 민주화의 1차 대상에서 <1영역>과 같이 친분이 강한 사적 관계는 뻬도 그만이다. 집에서 가족 사이에 부르는 호칭이야 가족 안에서 합의하고 가르치면 될 일이니 호칭 민주화라는 잣대로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친구처럼 서로 반말을 쓰는 관게에서도 호칭은 전혀 문제될 일이 없다. 이름이나 “야!”로 부르면 그만이다.
우리가 호칭 민주화의 대상으로 삼을 영역은 나머지 영역인데, 각 영역은 성격이 참으로 다르다. <2영역>은 주로 지위에 따른 서열이 호칭과 높임말 문화를 좌우하고, <3영역>에서는 주로 나이에 따른 서열이 호칭과 높임말 문화를 좌우한다. <4영역>은 서열 구조가 없거나 매우 약하기 때문에 호칭 민주화 문제가 비교적 수월하게 풀릴 수 있는 곳이다. 먼저 <4영역>의 호칭 문제를 살펴 보겠다.
3. 공공 호칭, ‘~씨’와 ‘~님’
무정형의 다중 속에서 신상을 잘 모르는 개인을 부를 때 병원, 은행, 민원창구 따위 공공시설에서는 이름 뒤에 ‘-씨’라는 호칭의 의존명사를 붙였다. 한때 병원에서 환자를 부를 때은행이나 세무서, 경찰서, 동사무소 따위에서 민원인을 부를 때 나이와 관계없이 “이건범 씨~”라고 불렀던 듯하다. 하지만 이제는 공공시설에서 이 호칭이 많이 사라졌다. 이 말이 비교적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로 회사에서 평사원을 부를 때 뒤에 아무런 직함이 없어 ‘~씨’를 붙이지 않으면 허전해서 붙이고, 사회에서도 특별한 직함이 없는 사람들, 특히 일용직 막노동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씨’라고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그래서 어엿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홍길동 씨~”라고 부르면 무시한다며 화를 낸다. 최근에 어느 야당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굳이 ‘문재인 씨’라고 부른 게 이런 경향을 활용한 사례라고 하겠다.
‘~씨’는 직장에서 윗사람이 직함 없는 평사원을 부를 때, 남녀 연인이나 부부가 서로를 부를 때, 경찰이나 법원처럼 비교적 권력이 살아 있는 딱딱한 일부 공공시설에서 민원인을 부를 때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호칭이지만, 많은 곳에서 ‘~님’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요즘에는 무정형의 다중이 모이는 곳이라면 이름 뒤에 '님'이라는 의존명사를 붙이는 것으로 호칭이 정리되고 있다. 처음엔 직함 뒤에 붙이는 접미사, ‘님의 침묵’과 같은 대명사로 쓰이다 1980년대부터 편지 받는 이의 ‘귀하’를 대신하여 ‘~님’이 쓰이기 시작했다. ‘씨’를 대체한 이 호칭은 그다지 거부감 없이 거의 모든 <4영역>에서 잘 사용된다.
이는 이 호칭이 1990년대 초반 컴퓨터 통신이 활발해졌을 때 누리꾼들이 자율적으로 정한 통신 예절에서 일시에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나이나 외모, 사회적 지위 등을 전혀 모르는 통신 공간에서 별명 뒤에 누구나 평등하게 '님'을 붙이는 것이 호칭상의 복잡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안이었던지라 대부분의 누리꾼이 이런 통신 예절을 받아들였다. 이 예절이 병원 등의 실생활 현장에도 퍼진 것이다.
따라서 나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일일이 따질 수 없는, 또 그럴 필요가 없는 공간에서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게 공평하고 분명한 예절로 자리 잡았다. 다만, 한 번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고 난 후에도 계속 그리 부를 것인가는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이름 대신 부를 대명사 호칭 같은 게 필요하다.
중국에서는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을 성에 붙여서 쓰거나 그것만 써서도 앞에 있는 사람을 높여 부른다. 우리도 '선생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는 하는데,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 말이 '교사’와 겹치는 뜻인지라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언뜻 듣기엔 남자들에게만 어울리는 호칭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중국에서도 대개 ‘선생’은 남자들에게만 사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점차 남자를 넘어서서 여자들에게도 사용되면서 사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호칭은 친분관계가 없는 경우와 친분관계가 있는 경우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서로 직함을 부르기 곤란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을 때 ‘선생’이라는 호칭이 어떤 상황에서는 듣는 이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도 있다는 점은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개신교 교회에서는 일종의 지위를 표시하는 직분인 ‘집사, 권사’라는 호칭이 있는데, 이런 교인들 일곱 명과 개신교를 믿지 않는 사람 세 명이 모였을 때 서로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교인이 다수라고 해도 그들이 서로의 직분으로 불러대면 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축시키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평소 익숙한 직분 호칭을 무시하고 모두를 ‘선생’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렇게 모호한 상황에서 호칭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상황이 모호하면 서로 ‘선생’이라고 통일하여 부르는 게 호칭의 민주화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여성은 직함이 없을 때 ‘홍길동의 부인, 길동이 엄마’ 따위로 불리는데, 이 역시 ‘선생님’으로 통용하는 것은 호칭에서 남녀 차별을 줄이는 길이 될 수 있다.
병원과 공공기관에서 '선생님' 대신 남성에게 '아버님', 여성에게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늘고 있는데, 이 호칭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주고 가끔은 듣는 이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기도 한다. 유치원이나 학교처럼 자녀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아버님, 어머님’이라는 호칭에서는 일종의 가식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호칭이 주는 가식은 '사장님, 여사님' 따위의 호칭 인플레에서 극에 이른다. 물론 이럴 때에도 남성 위주로 극존칭 호칭이 쓰이지 여성에게는 이런 극존칭 호칭이 잘 붙지 않는다. 남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여사’에 관해서는 한 가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영화 <카트>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직함 없이 청소, 매장 정리, 상품 계산 따위 육체 노동을 하는 중년 여성 근로자들에게 대개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여사(女史)’를 ‘1.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 2.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로 풀이하고 있으므로 이 지칭을 여성들에게 호칭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대통령 부인도 ‘여사’, 청소하시는 분도 ‘여사’라고 해서 이를 호칭 인플레라고만 볼 일은 아니다. 굳이 사회적 지위에 따라 여성의 공공 호칭을 차별할 이유는 없다. 다만, ‘여사’는 ‘선생’에 비해 묻어 있는 말빛이 ‘노년층, 구시대의’ 느낌이 조금 더 강하다.
4. 직장의 호칭과 높임말 문화
호칭 민주화에서 어려움이 일어나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직장처럼 친분이 강한 공적 조직이다. 지금까지는 직함 뒤에 '님'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건범 사장님, 이건범 대리님' 하는 식이다. 잦은 대화에서는 그저 직함 뒤에 '님'만 붙이면 되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문제는 직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호칭을 붙일 것이냐이다.
직장에서는 직함 없는 이에게 '씨'를 붙이는 곳도 있고 '님'을 붙이는 곳도 있다. 그런데 '씨'라는 의존명사가 호칭에서는 이미 낮은 사람이라는 말빛을 강하게 띠고 있으므로, '님'으로 가는 게 직함 있는 사람들과의 인간적 차별을 줄이는 방법일 것 같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직장 같은 곳에서 아직 직함이 없는 일반 사원에게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직함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 하지 않은 사람, 또는 신임 과거 급제자를 ‘선달’이라고 불렀다는데, 직장에서도 아직 직함을 받지 못한 평사원드을 ‘선달’이라고 불러주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직함이 없는 평사원 호칭 문제를 뺀다면 직장에서는 호칭보다 높임말이 더 문제가 된다. 우리 사회에는 높임말과 반말이 있는데, 현대 사회로 오면서 이를 사용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이 둘은 나이 많고 지위 높고 힘센 ’갑‘과 나이 적고 미천하며 힘없는 ’을‘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 쓰였다. 전통적으로는 ‘나이 많은 남자 윗사람-나이 어린 여자 아랫사람’이 직장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권력 관계였다면, 전에는 예외적이었던 조합들이 이제는 널리 나타난다. 극단적으로 ‘나이 어린 여자 윗사람-나이 많은 남자 아랫사람’의 관계도 쉽게 볼 수 있다. 새로 나타나는 이 서열에서 전통적으로 갑의 지위를 점하고 있던 ‘나이 많은 사람, 남자’들이 ‘나이 어린 사람’ 여자‘들에게 높임말과 반말 사용에서 헷갈려한다.
다행스럽게도, 직장과 같은 공조직 안에서는 나이와 지위, 남녀의 차이 없이 모두 높임말을 쓰는 게 좋다는 대화 문화가 상당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높임말과 반말이 위 아래 구분으로 작동해야 하느냐, 아니면 친한 정도에 따른 말법으로 남아야 하느냐 하는 판단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나이 많은 윗사람은 나이 어린 아랫사람에게 반말을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높임말을 하는 식이 아니라 높임말에는 서로 높임말, 반말에는 서로 반말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금 우리는 앞엣것에서 뒤엣것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보인다. 대개 호칭과 높임말은 서로 연결되어 격을 맞추지만, 공적인 관게에서는 높임말-높임말이 자리를 잡아가고, 사적인 관게에서는 과거의 서열 문화와 현재의 친분 문화가 공존한다.
5. 사적인 관계에서 더 어려운 호칭 문제
직장의 호칭은 분명한 서열 구조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쉽다. 문제는 자유직업인, 주부처럼 직함이 없거나 직함이 서로 통용되지 않는 경우다. 눈치와 판단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비공식 조직인 동아리나 사교 모임에서는 나이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편이다. 이런 곳에서는 친한 정도에 따라 서로 거북살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부른다. 친하면 '형님, 누님, 오빠, 언니'가 자연스럽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나이 많은 사람에겐 '선생님'이나 이름 뒤에 '님', 또는 사회적 직함 뒤에 '님'을 붙인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씨'를 붙이는 편이다. 주로 이런 관계에서 나이를 놓고 신경전을 많이 벌인다.
여기서 문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서 '이건범 님'이라고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불렸을 때 기분이 어떨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호칭이 이성 간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나이에 따른 서열 인정 욕구는 동성 간에 더 강하게 작동하므로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이 호칭이 통하게 될지 궁금하다. 나이 많은 사람이 동성의 나이 어린 이에게 '씨' 대신 '님'을 자연스레 붙일 수 있을지도 실험 대상이다. 그냥 이름을 부르며 반말로 대화하는 사이가 되기 전까지는 ‘~씨’를 붙이는 게 지금의 관행인 것 같다.
6. 있는 걸 없애기보다 없는 이에게 새 호칭을
권위주의를 없애기 위해 높임말을 없앨 수는 없다. 전통적인 직함은 사라질 수 있지만 직함 자체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따라서 직함 있는 사람들에게는 직함 뒤에 '님'을, 직함 없는 사람에게는 나이와 무관하게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것이 나이와 호칭 등에 따른 쓸데없는 갈등을 없애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기업과 같은 조직에서 직함을 없애고 모두가 이름 뒤에 ‘~님’만 붙이는 호칭 문화를 열어갈 수도 있다. 매우 파격이고 호칭의 혁명인데, 과거에 이를 도입하여 추진한 기업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젊은 기업에서는 직함을 떼어내고 모두 외국인처럼 별명을 지어 그 별명만 부르는 곳도 있다. 마치 옛날 조상님들이 호를 지어 부르는 식이다. 과연 이런 시도가 호칭 민주화에서 얻고자하는 이득을 제대로 얻을지는 좀 두고볼 일이다. 직장의 서열 구조 때문에 수평적이고 민주적이며 창의적인 대화와 일 처리가 어려우니 직함을 없애자고 하는 것일 텐데, 그런 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직함을 없앤다고 해결될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상실감 같은 것을 고려할 때 있는 직함을 없애기보다는 직함 없는 사람들에게 붙여줄 통합 직함 같은 걸 만들어 쓰자는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평사원은'선달', 비전속인(프리랜서)은 '금달', 학생은 ‘배달’, 주부는 '아리달', 은퇴자는 '은달' 식으로 말이다. 그 뒤에 '님'만 붙이면 기존에 직함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방식과 같아지니, 호칭 때문에 생길 마음고생은 줄어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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