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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사대주의에 대하여(4)

by 한글문화연대 2017. 3. 9.

[우리 나라 좋은 나라-67] 김영명 공동대표


사대주의에 대하여(4)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전두환 정부 이후 미국 정부가 원하는데 우리 정부가 안 한 것이 있으면 찾아와 보라는 숙제를 내준 적이 있다. 예상대로 학생들은 찾지 못하였다. 기껏 찾아온 것이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에 한국이 가입한 것이었다. 그런 조그맣거나 구체적인 협상 조건들 말고 국민 일반이 좀 관심을 가질 정도의 사안들, 예를 들어 주한 미군이나 북핵 문제 등에서는 한국 정부의 ‘항명’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항명’이 있기는 있다. 바로 국군의 전시작전권을 안 가져오겠다고 버티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미국 정부 말을 안 들을 때도 있기는 있으니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것이 미국의 바지자락을 붙잡겠다는 것이니 어찌 대견하다 할 수 있으랴.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이 정식으로 요청하지도 않는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를 자진하여 결정하였다. 설사 그것을 배치하더라도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우리 비용을 최소화하는 등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결정해야 할 터인데, 미리 덜컥 발표하는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근혜는 보수 사대주의자라 그렇다 치자. 진보파라고 일컫던 노무현, “반미면 어떠냐?”고 호기 있게 말하던 그 노무현이 한미자유무역 협정을 위한 실무 협상에 앞서서 미국 영화의 스크린쿼터를 미국 측이 요구하기도 전에 자진해서 축소한 행동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협상의 기본을 모르는 짓이라고 해야 할까 사대주의 때문에 위축돼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꼭 사대주의의 문제는 아니지만 어리석은 한국 외교의 치부들을 한두 가지 더 얘기해 보자. 1998년 김대중 정부는 한일 신어업 협정을 맺으면서 독도를 중간수역에 배치하였다. 독도 주변 해역에서는 한국 어부와 일본 어부 모두가 어업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말을 듣고 당장 떠오르는 것은 ‘아니 왜 우리 영토인 독도 해역이 중간수역이지?’ 하는 의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협정에 대해 독도 영유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였고, 실제로 이를 무효화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독도 영유권과 어업 중간수역은 별개로서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명하였고, 대법원도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실제로 둘은 별개인 모양이다. 그러나 계속 드는 의문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독도 해역을 중간수역에 넣었느냐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일본 어느 섬의 해역을 중간 수역에 넣는 반대급부를 얻었는가? 예를 들어 쓰시마 섬 주변 일본 영해를 공동 어로 구역에 넣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정부와 대법원의 말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여전히 의문스럽다.


박근혜 정부는 한술 더 뜬다. 30년 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지혜와 외교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본 정부에게서 10억 엔을 받고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합의 문서에 서명하였다. 10억 엔은 110억 원 정도이다. 강남 고급 아파트 두 채나 한 채 반 정도의 액수이다. 이걸 받고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단다. 그들의 머리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무 것도 안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단 액수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일본 정부가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구 역사가 끝날 때까지(아니 우주 자체가 없어질 때까지)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잘못을 모르면 입에 발린 겉으로의 사과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심어린 사과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아베 총리는 합의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일본 기자의 질문을 받고 그럴 의향이 “털끝만큼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아니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10억 엔이라는 거금을 내놓기로 한(억울한 일이지만 외교상으로 어쩔 수 없었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일에 대해 무슨 또 엉뚱한 사죄 운운인가? 나라도 아베처럼 대답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한국인들도 이런 점을 모르고 있다면 참 딱하다. 이런 점을 알고서도 일본을 압박하기 위하여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 정부는 한 번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진심어린’ 공감이나 동정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저 국내 여론에 못 이겨 일본에 뭘 요구하는 척하고 동시에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질까봐 전전긍긍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귀찮고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여는 집회도 눈의 가시 같을 것이다. 진심어린 공감이나 동정심을 못 갖는 것은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나 똑 같다. 그들은 모두 시간이 빨리 지나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이 그러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한국 정부가 그러는 것은 한국인을 분노케 한다.


위안부 합의를 하면서 일본이 계속 요구한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철거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 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하였다. 내가 일본인이라면 이 문구를 당연히 ‘(즉각은 아니더라도) 철거하도록 노력한다.’고 해석할 것이다. 일본 사람들만 욕할 것도 없다. 한국 정부가 그들의 행동을 조장하고 있다. 옛날부터 쭉 그랬듯이 말이다. 세상의 어느 외교 문서가 직접적으로 ‘즉각 철거한다.’ ‘당연히 철거한다.’ 이런 문구를 넣겠는가? 특히 양쪽 의견이 충돌할 때는 애매모호하게 표현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결과 사건이 터졌을 때 양쪽의 해석이 다른 것도 다반사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와 같이 국민 정서가 매우 중요한 이런 사안에서는 국민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졸속 합의하는 일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도대체 박근혜 정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다. 머리 속에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거나, 위안부 할머니들이 귀찮아 죽겠기 때문이거나, 그 둘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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