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최현배 기념관에서 한글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5기 하성민 기자
anna8969@naver.com
2018년은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 되는 해이다. 또한, 스승의 날인 지난 5월 15일은 세종대왕 나신 날이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래 그 정신을 이어받은 여러 국어학자들이 한글을 연구하고 우수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국어학자들은 암울한 시대 배경 속에서도 겨레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현재 우리가 쓰는 가로쓰기를 주창하고 한글의 보급과 기계화에 힘쓴 최현배는 그중 한 사람이다. 외솔 최현배는 주시경의 제자이기도 했다. 모처럼의 연휴에 국어학자로 평생을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쓴 최현배 선생의 생가터와 기념관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한글을 향한 외솔 최현배 선생의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최현배 선생의 생가터에 지어진 기념관. 휴일임에도 기념관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 기념관을 들어서기 전에 자리한 최현배 선생의 동상. 꼿꼿한 자세와 근엄한 표정에서 한글의 보급과 교육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학자의 면모가 보이는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싹튼 애국. 민족의식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 10월 19일, 지금의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서 태어난 외솔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다. 14살에 일신 학교에 입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은 그는 당시 구한말 나라 정세를 개탄하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사설을 읽고 목 놓아 울었다고 회고한다. 어려서부터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고 사랑했던 그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 주시경의 민족주의적 언어관의 영향을 받다
1910년에 관립 한성고등학교(일제강점기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국어강습원에서 주시경의 강의를 듣게 된다.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주시경 선생의 민족주의적 언어관은 이후 평생에 걸친 국어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일합방이 되고 1915년 졸업을 한 최현배는 관비 유학생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한 후 본격적으로 우리말을 가르치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식민지 시대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국어의 보존이었다. 선생은 문화가 바로 서야 타민족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문화 창조의 도구가 되는 국어의 어법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 결실이 국어의 문법 체계를 세울 목적으로 출판된 《우리말본》이다. 《우리말본》 머리말에 외솔 선생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한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중략)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계계승승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 활동의 바른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주시경 선생이 가르치는 국어강습소에서 우리말·글 교육과 민족사상을 익힌 최현배 선생이 받은 수업증. ‘익힘에 주는 글, 조선말을 익혔기에 이 글을 줌, 감사 주시경’이라고 쓰여 있다.
- 조선어학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옥중 생활을 하다
1926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취임한 외솔은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한글》지를 창간하고 한글날 제정에 참여했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 위원 및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일제가 중국 침략을 앞두고 민족주의 단체 회원들을 단속하기 위해서 조작한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교수직에서 강제로 물러나 옥고를 치르게 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또다시 옥중 생활을 하게 된다.
◀ 옥중 생활을 하는 최현배 선생의 모습을 재현한 인형
- 해방 이후 국어 교육을 위해 헌신하다
해방된 후에야 출옥한 외솔은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학교 교육에 힘을 쓴다. 35년간의 식민통치 시기에 일본어가 국어의 자리를 대체하며 한글에 관한 연구와 교육은 거의 공백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외솔은 국어교사 양성, 우리말로 된 교과서 편찬에 착수했고, 교과서편찬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을 수립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결의된 내용은, 초중등 교과서에는 모두 한글로 쓰되 한자는 필요한 경우에 괄호 안에 넣어 쓴다는 것과, 가로쓰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는 이전에도 각각 서재필이 <독립신문>에서 시도했고 주시경 선생이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솔은 이론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었다. 오늘날 우리말로 된 출판물은 이 당시 교과서를 편찬할 때 잡은 기본 방향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그는 문교부에 딸린 부서로 책을 편집하고 수정하는 일을 했던 편수국의 장이 되어 《한글 첫걸음》을 비롯해 각종 교과서를 50여 권 편찬하였다.
외솔은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에도 노력했다. 《큰사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표준말을 지정한 사전이었으며 한글 맞춤법에 따라 편찬되었다. 1929년 사회 각계인사 108명이 모여 조선어학회가 원고를 작성하였으며 1947년, 1949년 각각 첫째, 둘째 권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국어사전을 편찬함으로써 우리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가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증명하고 따라서 우리의 독립이 정당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 외솔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문교부 편수국장에 취임하였는데 ‘한글 사용 빈도 조사’를 해서 타자기의 자판 배열에 필요한 통계자료를 수집하였고 한글의 기계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에 맞춤법이 어렵다는 의견에 따라 이전의 철자법으로 맞춤법 간소화 안이 발표되었다. 이전의 철자법을 따르면 ‘받고, 받아’를 ‘밧고, 바다’로 ‘같이’를 ‘가치’로 쓰게 된다. 그러나 외솔은 이를 반대했다. 이 사건을 한글 파동이라고 한다. 한글 파동 이후 문교부를 떠나 다시 연희대학교 교수로 가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며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한글의 투쟁》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외솔은 우리의 옛말 문법책을 집필하다가 1970년에 타계했다. 정부는 평생을 국어의 연구와 교육에 힘쓴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1962년 건국공로 훈장을, 1970년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금서집’이라는 이름의 방명록에 쓰인 최현배 선생의 글. 서슬이 퍼렇던 일제강점기에 한글로 ‘한글이 목숨’이라는 글을 쓴 것을 통해 선생이 강직하고 당당한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콩깍지는 3년이면 벗겨진다는 말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영원하기란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에게 한글이란 평생을 바쳐 연구해도 질리지 않는 존재였을 것 같다. 외솔 기념관을 둘러보며,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를 되찾는 방법의 하나로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고 한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데 모든 시간을 보낸 최현배 선생이야말로 진정 우리말 사랑꾼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절대 벗겨지지 않는 콩깍지를 스스로 쓴 채 한글을 사랑했던 최현배 선생 덕분에 우리의 어문생활이 더욱 발전했음을 느낀다.
'사랑방 > 대학생기자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한말 써도 못 봤습니다.”-이상원 기자 (0) | 2018.05.31 |
---|---|
우리 한글, ‘치지’ 말고 ‘쓰자’-강아현 기자 (4) | 2018.05.31 |
외국인에게 추천할 만한 서울의 명소는 어디일까?-이아령 기자 (0) | 2018.05.29 |
꽃의 숨겨진 의미와 이야기-조혜겸 기자 (0) | 2018.05.25 |
대학 건물 이름, 반드시 영어로 붙여야 할까?-박다영 기자 (0) | 2018.05.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