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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모람방

[수상소감] 한글이 목숨이다.-이건범 대표

by 한글문화연대 2018. 10. 24.

2018년 외솔상 수상 소감

한글이 목숨이다. 이건범 / 한글문화연대 대표

 

2015년 8월 13일 12시쯤으로 기억한다. 한글회관 앞을 떠난 ‘한글 교과서’ 장례식 상주와 모여든 시민들이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정책의 그릇됨을 고하고 주시경 공원을 거쳐 청와대 밑 청운동사무소 앞에 다다랐다. 마당을 가득 메운 장례 행렬은 기자회견문을 읽은 뒤 우리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6미터는 족히 됨직한 종이에 강병인 작가가 큰 붓으로 “한글이 목숨이다”를 결연하게 써간 것이다. 한동안 숨소리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내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더니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는 복받치는 설움으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2014년 9월에 교육부에서 발표한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방침에 맞서 싸우던 한글단체들이 2015년 5월에 황우여 당시 교육부총리와 만나 한자병기의 문제점을 충분히 알려 설득하였음에도, 한 번 발표한 방침을 거두어들이기는 쉽지 않았나 보다. 한글단체와 교육단체, 시민단체가 힘을 모아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반대 국민운동본부>를 만들고 광화문 세종로 네거리에서 매일 반대 서명 운동을 벌였지만, 교육부 담당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국민의 관심을 끌어모을 효과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8월 24일로 예정된 교육부 공청회를 앞두고 나는 ‘한글 교과서 장례식’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리 뜻을 정부와 국민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8월 6일께 상황이었다. 국회 도종환 의원실에서 주최한 ‘한자병기’ 주제의 토론회 발표를 동시에 준비하면서 기획을 시작했던지라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았다.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이었던 김명진, 정인환 두 분이 함께 밤을 새워가며 준비하지 않았다면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계획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초등교과서 표지로 5개의 한글 교과서 영정을 만들고, 온갖 장례 물품을 준비하였다. 상복과 돗자리 등의 소품은 장례 대행업체에서 구하면 되었지만, 잔손 가는 일이 한둘이 아녔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만장은 전남 담양에서 대나무를 주문해 만들어야 했고, 곡소리와 장송곡 음악 등도 찾아야 했다. 한글회관 앞마당에 처음 돗자리를 깔고 한글 교과서 영정 앞에 향을 피울 때만 해도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릴지 어떨지 걱정이었다. 우리 한글운동 쪽 분들도 좀 쭈뼛 쭈뼛하는 눈치였다. 언론과 국민이 관심을 두어야 할 텐데…. 하지만 언론이 바로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다음날 한글회관 앞에서 한글 교과서 영정을 들고 세종로 네거리 쪽으로 행진을 시작할 때 처음으로 눈물이 솟았다. 그 눈물은 고단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싸움을 해야 하나, 버젓한 우리 글자 한글로 우리말 표현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이해에도 아무 어려움이 없건만, 언제까지 한자 타령에 국민의 머리와 어린아이들의 가슴을 멍들게 할 것인가……. 내 눈물엔 정부에 대한 짙은 원망과 국민의 무관심에 대한 야속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한글이 목숨”이라는 최현배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만난 순간, 그 고단함은 짙은 서러움으로 무너져 내리다 어느 순간부터는 반드시 이기고야 말리라는 의지로 솟구쳤다. 1930년대, 우리말과 한글을 아예 잃을지도 모를 엄혹한 시대 상황에서 ‘한글이 목숨’이라고 당당히 방명록을 남기셨던 외솔의 의지와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나는 얼마나 허약한가. ‘모진 고문에 목숨을 잃어가며 그렇게 지켜온 한글이고 우리말이다. 비록 역사의 반동이 물결치고 있지만, 이 물결이 사그러들 날 또한 반드시 올 것이다.’ 그리 다짐하며 나는 상복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 뒤로 나는 지치지 않고 싸웠다. 한자 병기와 혼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샅샅이 파헤쳐가며 분석하여 이론적 대안을 만들고, 한자 문제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서를 대중적인 문체로 출간하였다. 그렇게 나온 책 <한자 신기루>는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분들이 국어기본법의 한글전용 규정을 상대로 낸 위헌 소송에서 우리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 변호인들에게 매우 효율적인 길잡이 노릇을 했고, 내가 참고인 의견서를 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 눈을 혹사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시력을 많이 잃은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다.

 

한자를 떠받드는 분들의 지나친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음이 다 밝혀져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느낌이다. 한글전용의 정당성은 2016년 11월에 헌법재판소가 국어기본법의 헌법적 정당성을 밝힌 일에서, 그리고 2018년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정책의 폐기에서 모두 확인되었다.

 

한자의 파상 공세가 끝난 이 시점에 나는 해방 뒤 외솔의 ‘우리말 도로 찾기’를 다시 생각한다. 당시엔 일본에 짓밟혀 사라진 우리말을 도로 찾으려는 노력이었다면, 이제는 영어에 자칫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위험에 처한 우리말들을 도로 찾아야 한다. 외솔상을 주신 뜻이 그런 실천에 앞장서라는 것임을 내 머리에 새긴다. 다만, 시대가 바뀌었듯이 외솔께서 온 힘을 쏟았던 우리말 도로 찾기와 나의 우리말 도로 찾기는 각도가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어와 한자에 맞서며 현대 국어를 정립해야 했던 외솔 선생님을 비롯한 한글학회 국어학자, 운동가 선배님들의 땀에 힘입어 우리말과 한글은 우리 땅과 머리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다. 어문규범과 사전도 이제는 어엿하게 정비되어 돌아가고 어휘 자원을 다스리는 말뭉치 작업도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인터넷 신조어와 급식체 등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요인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국어 내부의 큰 걱정거리는 없다.

 

문제는 외국어 능력에 따른 언어 차별과 사람을 따돌리고 혐오하는 차별어 사용 등 언어가 폭력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현실이다. 사람의 알 권리와 존엄을 지켜내는 일은 국어운동에서 매우 중요하고, 다가오는 미래의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 근대 국민국가의 기틀을 잡는 문제였다면, 이제는 사람의 권리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아니, 우리의 관심이 그렇게 옮아가고 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영어에 밀려나는 우리말을 도로 찾는 일이 이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일로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한글이 목숨’이라고 하셨던 외솔의 말씀은 우리 겨레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이다. 새 나라를 세워 어엿하게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누는 지금, 나는 외솔과 같은 절박함으로 국어와 한글을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절박함이 줄어든 만큼 조금은 더 여유롭게 한 발짝 물러서서 국어와 사람의 관계를 살피려 한다. 이제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과제라고 여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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