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 연준 의장 “금리 인상 속도, 다시 올릴 준비 돼 있다”(제목)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이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다시 올릴 수 있다고 밝혔다. (중략) 파월 총재는 7일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에서 “최근 경제 데이터가 예상보다 강하게 나온 것은...(후략)
어느 신문 기사의 일부다. 기사 제목에 나오는 ‘연준’은 대부분 독자들이 알고 있는 약칭이다. 흔히 ‘연방준비제도’라고 불리는 미국 중앙은행 ‘Federal Reserve System(Fed)’를 줄인 말이다. 그런데 연방준비‘제도’에 ‘의장’이 있다니? 제목만 보면 언뜻 이해할 수 없다. 기사 본문 첫 줄에서야 여기서 말하는 의장이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의장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대목에서는 이 ‘의장’을 ‘총재’라고 부른다. 혼란스럽다.
이같은 혼란은 미국의 중앙은행제도의 복잡함에서 비롯한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Fed, 일명 ‘연준’은 최종 의사결정 기구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 시중의 통화량을 조절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 미국 12개 지역에 산재한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s)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한국은행이 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나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 복수의 기관과 조직이 결합하여 작동하는 ‘체제’다.
그래서 우리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주며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에 등장하면서도 그 개념이나 명칭이 어수선하게 혼용되고 있다. 위 기사 사례에서도 제롬 파월은 연방준비‘제도(system)’가 아니라 그 구성 기관인 ‘이사회(board)’의 ‘의장(Chair)’이라 쓰는 게 적절하다. ‘총재(president)’라는 표현은 더더욱 부적절하다. ‘총재’는 보통 이사회가 아닌 ‘은행 기관’의 수장에 사용하는 명칭으로, 연준에서는 각 지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장에게 쓰는 게 적절하다.
사실 이같은 혼란은 이 기관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1920년 5월 처음 <동아일보> 기사에 ‘연방준비은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래 ‘미연준은행’ ‘FRB연방준비국’, ‘연준은’, ‘연방준비은행’, ‘연방준비제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심지어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매일경제> 한 언론사에서만도 ‘미연방준비리’, ‘연준(중앙은행)’, ‘미연방준비이사회’, ‘미연방준비은행이사회’ 등 다섯 개 이상의 이름을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반면, 우리말 줄임말 ‘연준’은 1933년 7월 <동아일보>에 ‘미국연준비은행’, ‘미국연준은행’의 형태로 처음 사용된 뒤, 국내 언론에 완전히 정착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에 이날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선 연준이 5월 기준금리를...(후략)(<한국일보> 2023년 4월 11일)처럼 최초 언급 시 괄호 안에 영문 약자 Fed와 ‘연준’을 모두 표기하고, 반복 언급 시 Fed 대신 ‘연준’을 사용할 만큼 Fed를 대치한 약어로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따라서 숙제는 우리말 온 이름을 가다듬는 일이다. 현재 대부분 언론이 사용하는 이름은 ‘연방준비제도’. 위에 언급한 다양한 표현이 90년대 들어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 수렴되었다가 2000년 무렵부터 ‘이사회’를 뺀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이사회’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연방준비제도’가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 ‘제도’라는 이름은 원어 ‘시스템’을 충실히 번역한 명칭이지만, 한국에서 ‘제도’라 하면 형체가 있는 특정 역할의 주체나 기관보다는 무형의 체계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한국의 중앙은행 기능을 하는 미국의 ‘금융 기관’이라기보다 ‘지불 준비 제도’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마저 안고 있다. 그래서 ‘제도’라는 이름으로는 일반 국민들이 미국의 Fed에 해당하는 한국의 기관을 등치해서 떠올리기 어렵다. 이 때문에 언론 보도에서는 “미국의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연방준비제도의....”라는 식으로 설명을 붙이기도 한다. 경제 전문기자마저 연준의 각 기관 수장의 직함 표기를 헷갈릴 정도이니 하물며 일반시민들에게 ‘연방준비제도’라는 추상적 명칭은 그 역할과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 중에는 이 제도의 핵심은 ‘준비 기금(reserve)‘이므로, ’연방준비기금’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낸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이라는 기금이 여러 가지 경제 행위를 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는 의견이다. 물론 ‘제도’를 쓰는 것보다는 훨씬 가까워지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중앙은행이라는 성격을 전하기에는 부족하다. 차라리 ‘제도’라는 말 대신 ‘은행’이라는 말을 사용해 ‘연방준비은행’이라 부르면 어떨까? ‘미국 연방준비은행’이라고 말이다. 과거 우리 언론에서도 수차례 이렇게 불렀으니 그리 생뚱맞을 건 없다. 우리의 한국은행이 가진 위상과 기능을 즉각 연상할 수 있는 이름 아닐까?
물론 ‘Fed’의 구성 기관인 12개 지역 ‘Federal Reserve Bank’의 직역과 같으므로 혼동될 염려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언론에서 특정 지역은행을 지칭할 경우에는 모두 앞에 ‘뉴욕연방(준비)은행’이라는 식으로 지역을 명기하며, 중앙은행으로서의 연방준비은행을 가리킬 때는 최초 언급 시 대개 ‘미(미국)’을 붙이기 때문에 혼동 위험이 적다고 본다. “미국 시카고 연방은행 총재가 ‘금리가 0.5%포인트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습니다”라는 SBS뉴스보도(2022년 4월 12일)처럼 ‘준비’를 빼고 ‘지역명+연방은행’ 형태로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러면 더더욱 연준과 구분하기 쉽다. 지역의 연방(준비)은행을 ‘연준’과 차별화하여 ‘연은’으로 줄여 부르는 언론보도도 더러 찾을 수 있다.
한편 ‘연방중앙은행’이라는 명칭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실제 <한국경제>에서는 ‘연방준비제도’ 대신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미 우리말 약어로 정착된 ‘연준’과 연결할 수 있는 온 말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명칭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좋겠다.
이에 국제기구 등의 로마자 약칭 대신 쓸 우리말 약칭을 만들고자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어문기자협회,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이 꾸리고 국립국어원이 참여하는 ‘우리말약칭제안모임’에서는 약칭이 이미 ‘연준’으로 자리잡은 ‘Federal Reserve System’의 우리말 온 이름을 ‘연방준비은행’으로 제안하였다.
’연준‘의 온 이름을 ’연방준비제도‘에서 ’연방준비은행‘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어떤지 의견을 물어보았다. 적은 수가 답했지만, 기자 67명 가운데 62.7%가 긍정으로 답했고, 29.8%가 부정으로 답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티앤오코리아에서 성인 1천 명을 상대로 벌인 여론조사에서 ’연방준비제도‘가 무엇인지 아는 국민은 34.8%였고, ’연방준비은행‘으로 바꾸자는 제안에 대해 적절하다는 응답은 79.6%, 부적절하다는 응답은 20.4%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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