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수석’, 이런 이름은 국민 통합에 걸림돌
국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바꾸자
엊그제 출범한 새 정부 첫걸음에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그냥 흘려보내선 안 될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말이 중요하다. 국민주권정부라면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는 말과 글자로 정책을 표현하고 추진해야 한다. ‘AI’는 ‘인공지능’으로, ‘RE100’은 ‘재생100, 재생전력100’으로, ‘K-이니셔티브’는 ‘문화주도국’ 또는 ‘세계 주도국’으로 바꾸어주길 바란다. ‘AI미래기획수석’과 같은 이름은 실정법인 국어기본법에도 어긋나고 국민 통합에도 좋지 않다. 설사 언론에서 ‘인공지능(AI)’라고 적은 뒤로는 줄곧 ‘AI’라고 적거나 말하더라도 따라하지 말고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인공지능수석’으로 부르자. 우리말과 한글로 하자.
지난 5월 1일 노동절에 나는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한국노총 지도부와 협약을 맺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 전날 작성하여 어느 일간지에 기고하려던 글을 이재명 후보에게 직접 전달할 수도 있겠다 싶어 노동절 아침에 급히 인쇄하여 편지 봉투에 넣고는, 눈 안 보이는 나 대신 한글문화연대 부대표에게 그 글을 전달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후보 경호가 강화되던 시점이라 어떨지 몰랐으나, 우리 부대표는 당시 협약이 진행되던 곳의 지형지물에 밝았고 판단력이 좋은 분이라 홍길동처럼 홀연히 경호망을 헤치고 이재명 후보에게 다가가 나의 글을 전달했다.
‘케이 이니셔티브, 말 바꾸자’라는 제목으로, 이재명 후보의 출마 영상에서 이 용어를 접하고는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다. 첫째, ‘이니셔티브’라는 말이 국민 가운데 16.4%만 아는 어려운 말이라 정책 이해가 안 된다는 점이다. 둘째,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를 갈라칠 위험이 있으니 사회 통합에 저해된다는 점이다. 셋째, 세계를 주도할 우리 문화는 우리말과 한글로 지으니, 이런 구호는 문화국가 원리에도 어긋난다는 점이다.
이재명 후보가 봉투에서 글을 꺼내는 장면까지는 보았다고 했으나, 이 대통령이 그때 그 글을 다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이미 발표한 정책이라 그랬는지 말이 바뀌진 않았다. 그 뒤 선거 공보물에 보니 ‘AI’가 그득하고 ‘RE100’이 나오고, ‘K-이니셔티브’도 남아 있었다. 굳이 이런 말들을 우리말로 바꿔야 하냐, 일만 잘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 글에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시계 공장에 다니며 어렵사리 공부한 소년공 출신 이재명 후보는 분명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이 후보의 관심과 배려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는가? 전태일은 주요 어휘가 모두 한자로 적혀 있던 근로기준법과 그 해설서를 마주하고는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안타까워했다. 어려운 말과 글은 어떤 국민에게는 너무나도 높은 장벽인 것이다.”(경향신문, 2025. 5. 22.)
언어는 인권이다. 개인들의 사적인 대화야 내가 간섭할 일도 아니고 간섭할 수도 없지만, 공공언어는 다르다. 국민의 안전과 재산과 기본권과 의무, 그리고 행복 추구의 길을 알려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용어 등 공공언어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용어와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국어기본법 제14조에서는 “공공기관 등은 공문서 등을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하며,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고 정하였다. 신조어나 전문용어의 뜻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거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을 때는 괄호 속에 외국 문자나 한자를 적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외국어로, 게다가 외국 문자를 앞세워 적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할 위험이 있다.
사실, ‘에이아이(AI: Artificial Intelligence)’는 이제 일반 국민 중에서도 쓰는 이가 많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정보통신 전문가들 위주로 사용하던 말이었으나,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2017년 에이아이 스피커 출시와 광고, 그리고 4차산업혁명의 위험을 알릴 때도 에이아이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기에 사람들 귀에 익숙해졌다. 그리고는 이를 활용한 생활용품이나 전화기 앱,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서 에이아이는 국민들 입에도 익숙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원래 ‘인공지능’이라는 우리말 번역어가 잘 사용되고 있었다. 방송에 자주 출연하던 몇몇 과학자들은 다른 출연자들이 ‘에이아이’라고 말할 때도 ‘인공지능’으로 말하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목격했다. 언론 보도에서도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에이아이’ 못지않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새 정부에서 ‘AI미래기획수석’과 같은 자리 이름을 만들면 곧 ‘인공지능’은 설 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말로 기술과 학문을 설명할 수 없게 되고 뜻 모를 로마자 약어가 횡행하는 속에서 문화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대체로 외국에서 들어온 단어를 사용하는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시적 동기이다. 새로운 문물이나 현상과 함께 들어온 말을 대체할 우리말이 제대로 마련되기도 전에 외국낱말이 매우 빠르게 널리 사용되어 이를 가리킬 말이 그것밖에 없는 경우이다. 버스, 컴퓨터, 디지털, 인터넷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낱말은 ‘외래어’라고 하여, 고유어, 한자어와 함께 우리 국어 어휘의 한 갈래로 친다. 출신은 외국이지만 우리도 쓰지 않을 수 없는 낱말이니 문제 삼을 일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표현적 동기이다. 외국낱말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있음에도 새롭게 포장하려거나 자신을 과시하려거나, 외국낱말이 효율적이고 미묘한 차이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여 사용하는 경우이다. 모빌리티(탈 것, 이동장치), 리스크(위험), 인프라(기반시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말 번역이 가능함에도 두어 개 외국낱말의 조합에 머리글자만 따서 약어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R&D(연구개발), ICT(정보통신기술), MOU(업무협약), TF(전담조직) 등이 대표적이다.
‘이니셔티브’와 ‘AI’, ‘RE100’ 등은 지시적 동기에 따른 외래어 사용이 아니라 표현적 동기에 따른 외국낱말 사용에 해당한다. 이게 개인의 사사로운 표현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 국민 모두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칠 공공언어이기 때문에 나는 이 대통령이 이 문제에 조금만 더 깊이 고민해주길 바란다. 국민주권정부라고 하니, 부하 직원들이 외국낱말을 사용하더라도 우리 국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공용어인 한국어 낱말로 바꾸어 사용하도록 지휘해야 한다.
우선, ‘AI’부터 ‘인공지능’으로 바꾸자. 발음해보면 ‘에이아이’도 4음절, ‘인공지능’도 4음절이라 길이 차이가 없다. 글자로 적을 때도 ‘인공지능’ 4글자, ‘ai’ 2글자라 짧아 보이지만 효율은 전혀 높지 않다. 한글로 쓰다가 영문 변환 글쇠를 누르고 대문자 선택하고 ‘AI’라고 친 뒤 한글 상태로 돌아와야 하니 손이 적잖이 간다. 자칫 잘못하여 소문자로 치면 지우고 다시 쳐야 하니 짜증이 날 때도 있다. 의미 차이는 전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인공지능’이라고 말하면서 회의 다섯 번만 하면 주위 비서들과 장관들 모두 바꿀 테고, 언론에서도 바꿀 것이다. 새로 만드는 수석 자리도 ‘인공지능미래기획 수석’으로, 줄여 부를 땐 ‘인공지능 수석’으로 이름 붙이는 게 좋겠다. ‘AI수석’이 자리 잡아 버리면 온갖 외국낱말과 로마자 약어가 정책용어로 등장하여 국민 소통과 사회 통합을 방해할 것이다. ‘RE100’이 대표 사례이다.
환경 정책에서 매우 중요한 재생에너지 문제를 ‘RE100’이라는 암호로 표현하지 말자. ‘RE100’은 기업이 화석 연료가 아니라 재생에너지(Renewable Energy)만 100% 사용하게 하자는 정책이자 국제 운동의 이름인데, 영어로 한 번 꼬고, 머리글자만 따는 식으로 두 번 꼰 이 말을 이해하거나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일반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팍 줄여서 ‘재생100’으로 부르고 정책 효율을 높이자.
마지막으로, ‘K-이니셔티브’는 아직도 정체를 모르겠다. 굳이 국민에게 영어 공부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괜히 ‘멋진 말’에 현혹되지 말고 의미가 분명한 우리말로 표현해 주기 바란다. 그게 사회적 비용과 부담을 줄이고, 국민 모두가 정책을 쉽고 편하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이니셔티브나 거버넌스나 다 뜻이 아리송해 국민이 정책을 평가하기도 어렵게 만드는 암초에 가깝다.
헌법재판소의 일치된 판결로 불법 계엄 주동자를 파면하고 어렵사리 새로 출범한 정부이기에 더더욱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공화국은 생각이나 재산이나 나이나 학력이 다르더라도 국민 모두가 공동선을 향해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우선 알아들어야 공론장에서 자기 뜻을 밝힐 수 있다. 공공언어에서 쉬운 말을 쓰자.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AI수석’, 이런 이름은 국민 통합에 걸림돌 < 민들레 들판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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