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랑방/대학생기자단

[13기] 보이지 않던 여성들을 ‘호명’하는 영화의 힘 - 13기 조서현

by 한글문화연대 2026. 8. 25.

보이지 않던 여성들을 ‘호명’하는 영화의 힘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13기 조서현 기자

s3ohyuncho@gmail.com


홍재희 영화감독을 만나다
“한 편의 영화가 수십 편의 논문보다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 홍재희 영화감독, 작가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지금 여기에 호명한다.”

19회 여성인권영화제 예심 심사평에서 홍재희 영화감독은 ‘호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이름을 부른다’ 대신 ‘호명한다’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0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홍 감독은 질문을 듣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바로 그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 표현을 의도적으로 골랐다고 말했다.

“일상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어쩌면 딱딱해 보이는 단어를 일부러 써서 여성 노동자에 한 번 더 시선을 두게 하고 싶었어요. 이름은 있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사람이 있잖아요. 무대 위에 그 사람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사람들이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 그게 제가 말한 호명이에요.”

홍재희 감독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단편영화 <암사자들>, 장편영화 <아버지의 이메일>을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선보인 것을 계기로 10년 동안 영화제와 함께하고 있고, 올해도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친근함과 만만함 사이, 우리가 누군가를 부르는 방식

홍 감독은 한국 사회의 호칭에 나이와 가족관계에 따른 위계가 깊게 배어 있다고 짚었다. 연인 사이에서도 ‘오빠’, ‘누나’라고 부르고,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이름을 부르는 일은 무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종업원을 ‘이모’라고 부르는 관행을 예로 들며 “왜 고모가 아니라 이모일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이모’라는 호칭에 친근함과 함께 상대를 쉽게 부를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인식도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를 낮추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홍 감독은 이런 호칭이 어떤 관계를 전제하는지를 짚었다. 무심코 사용하는 말이 어떤 권력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주변에서 ‘이모라는 말 하나 가지고 피곤하게도 산다’고 해요. 하지만 이게 제 삶이고 제 가치관인 걸 어떡하겠어요.”


“집에 가서 애나 보지”라는 말이 지우는 것

홍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집에 가서 애나 보지”라는 말이다. ‘애나 본다’는 말에는 아이를 돌보는 일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선이 담겨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애나 본다’는 말이 제일 싫어요. 일은 곧 삶이잖아요. 그런데 왜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살림은 일로 취급받지 못하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은 좀처럼 ‘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여성의 노동이 오랫동안 ‘본성’이나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한 역할’로 여겨져 왔다고 덧붙였다. 

“여성은 역사 이래로 일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집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여성들이 노동해 왔지만 그 노동은 종종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됐고, 임금을 받는 여성 노동자조차 '공순이' 같은 비하의 언어 속에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여성들이 했던 노동을 다시 불러주고 싶었어요."

최근 독립영화에서 여성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반가운 변화였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노동을 부끄러워하는 시선이 있었다면, 요즘 젊은 감독들의 영화에서는 그 노동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딸들의 시선이 보여요”라며 “그 변화가 정말 기적처럼 느껴집니다”라고 했다.


보이지 않던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

홍 감독은 영화가 논문이나 글과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전달한다고 말했다. 

“한 편의 영화가 수십 편의 논문보다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라는 심사평에 대해 “누가 힘들 때 논문 찾아서 읽고 싶겠냐”고 웃었다. 이어 영화는 화면과 소리로 현실을 직접 보여주는 매체라고 설명했다. 인물의 표정과 몸짓, 노동의 현장을 눈앞에 제시하기 때문에 배경지식 없이도 현실을 체감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두고 “이런 게 영화의 효능감”이라고 했다.

홍 감독은 이러한 효능감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올해 여성인권영화제 수상작 네 편이 모두 다큐멘터리였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보았다.

“호명되지 않은 사람을 호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조금 쉬워져요. 허구화 과정이 없다는 것이 문턱을 낮춰주는 거죠.”

다만 다큐멘터리 장르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여성인권영화제가 주목하는 현실과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이 만나면서 그 힘이 드러난 결과라는 것이다.


여성인권영화제, 호명되지 않은 이들을 위한 무대

홍재희 감독은 여성인권영화제를 가부장적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을 영화로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모든 이야기가 모든 공간에서 똑같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누군가에게 익숙한 현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짚었다. 그렇기에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영화로 만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 감독은 여성인권영화제가 그렇게 “아직 호명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관객에게 건네는 무대”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 더 많은 이름이 불리기를 바라고 있다. 더 많은 이름이 불리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은, 영화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