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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한글로 물든 백성의 삶 - 서경아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16. 8. 1.

한글로 물든 백성의 삶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3기 서경아 기자

calum0215@gmail.com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전시장 입구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달달 외우곤 하였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기억하는가. 누군가에겐 그저 시험을 위한 암기에 불과했을 이 짧은 문장엔, 세종대왕이 어린 백성을 아꼈던 마음에서 시작된 한글의 역사가 담겨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지난 1일부터 원내 장서각 전시실에서 한글 반포 570돌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전을 선보이고 있다. 12월 31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왕실과 민간의 다양한 한글 자료를 통해 백성의 삶 깊은 곳에까지 스며들어있던 세종의 애민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자리다.

 

마진마을 평민, 천민들의 상계문서

니슌삼이, 김슈벅이, 김바회, 손삭담이 등 이름만으로도 그 출신이 평민과 노비였음을 알 수 있는 자들의 명단이 적힌 이 문서는, 경남 진주 재령 이 씨 종가의 고문서 더미에서 발견된 ‘상계문서’이다. 상계는 상을 치르고 제사 지내는 일을 서로 돕기 위해서 만든 계를 뜻한다. 평민과 노비들이 스스로 모임을 주재하고 그 의지를 실현했을 뿐만 아니라 한글을 통해 삶의 내용을 주체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상계문서는 큰 의미가 있다.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배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놈이 하니다.”

 

 ‘니르고져’는 백성들이 억울함을 알리고자 할 때를 말한다. 어린 백성의 가장 아래에 있는 천민이 한글로써 뜻을 펼쳤던 순간이 담긴 상계문서.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표현하여 억울함을 알릴 수 있길 바랐던 세종의 꿈이 이루어진 결실이라 할 수 있다.

 

“… 너희 보고 서럽게 여길 뿐이지만, 마음 둘 때가 아주 없어 편지를 쓴다. 일백 권에 쓴다 한들 다 쓰겠느냐? …(중략)… 아들들까지도 나를 시샘한다 하므로 나는 열아흐레 날부터 아픈 것을 지금까지 마치어서 앓는다. …”

한 여인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이 글은 '어머니 신천강씨가 딸 순천김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그 내용은 시집간 딸의 안부를 묻고, 남편이 들인 첩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터놓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일백 권에 쓴다 한들 전하지 못할 여인의 마음을 종이에 담아내고자 하여도, 말과 글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 한자로 쓰여야 했다면 그 섬세한 감정들을 미처 표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편지는 한글이 창제된 지 백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데, 한글이 지방의 사대부가에서 편지글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한글 보급과 전파의 속도를 보여준다.

 

“…사람마다 쉽게 배우고 익혀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탄생부터 회갑까지의 삶이 담긴 한산이씨 고행록

누군가만을 위한 문자가 아닌 누구나를 위한 문자였던 한글은 모든 계층 간의 소통과 배려 그리고 화합을 지향하였다. 여성은 수동적으로 글을 읽는 독자에서 벗어나 제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일상적인 편지뿐만 아니라 문서 및 각종 기록을 직접 작성하면서 문자생활의 영역을 점차 확장해 나갔다. 여성의 역할이 요구되는 음식, 의복, 제사 등을 비롯하여 그들의 평생에 이르는 이야기까지 기록으로 남겼는데, ‘음식디미방’, ‘한산이씨 고행록’ 등이 그 예시이다. 여성들의 드러내지 못했던 목소리를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차별 없이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의 마음 이 담긴 한글이었다.        

                 

한글이 가진 과학적 우수성과 언어학적인 가치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연구 자료를 통해 밝혀져 왔기에 누구나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 전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문자적 우월함과는 조금 다르다. 왕실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윤리를 전하는 교육서로, 때로는 백성을 살리는 의학 서적으로서 혹은 누군가의 사랑이 담긴 편지로서도, 백성의 삶 그 자체로 존재해왔던 한글. 이번 전시가 보여주는 것은 ‘한글로 물든 백성의 삶’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 물들어있는 한글은, 장서각에 있는 수백 년 전의 편지보다도 빛바랜 색이진 않길 바라며 전시장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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