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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안 지키고 못 지키는 띄어쓰기 규정

by 한글문화연대 2013. 9. 5.

[우리 나라 좋은 나라-2] 김영명 공동대표

 

 젊었을 적에 나는 띄어쓰기 규정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필사의 노력이 다 헛된 짓이 될 때가 많았다. 논문이나 책을 쓸 때에 내가 아는 띄어쓰기 규정에 따라 낱말마다 다 띄어 써서 글을 보내면 출판사에서 제 맘대로 붙여서 교정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교정을 보면서 이를 다시 띄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은 싸우기 귀찮아서 출판사에서 하는 대로 내버려둔 적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한글 띄어쓰기 규정을 다시 한 번 보았다. 큰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띄어쓰기는 낱말을 단위로 하되 조사는 윗말에 붙여 쓴다.
 2) 수를 우리 글로 적을 경우, 십진법에 따라 띄어 쓴다.
 3) 둘 이상의 낱말로 된 고유명사는 낱말을 단위로 띄어 쓴다.
 4) 성과 이름은 띄어 쓴다.
 5) 둘 이상의 낱말이 합쳐서 한 뜻의 낱말이 된 말(복합어)은 붙여 쓴다.
 6) 문장에서 앞뒤의 관계가 특별한 경우에는 적당히 붙여 쓸 수 있다.

 

 이 중 6번은 무슨 말인지 아리송해서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 “문장에서”를 “문장 안에서”라고 썼더라면 훨씬 더 빨리 이해했을 것이다. 나머지는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규정들이다. 그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쉽게 지킬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5번의 경우가 문제다. 이 규정에 따르면 복합 명사가 아닌 명사는 다 띄어 써야 한다. 그래서 내가 다 띄어 썼더니 도로 붙여 놓는 편집자들이 많더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명사가 둘 이상 이어질 때 이를 복합 명사, 곧 하나의 낱말로 볼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된다. (그런데 ‘복합 명사’는 복합 명사일까 아닐까? 이 또한 의문이다.) 예를 들어 ‘복지 국가’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를 복합 명사라고 보지 않는다. 이를 복합 명사라고 보면 문화 국가, 통상 국가, 근대 국가, 강성 국가, 군사 국가 등도 모두 복합 명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어 어휘 숫자나 늘려 볼까?

 복지 국가를 복합 명사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이를 띄어 썼다. 그러나 나처럼 이를 띄어 쓰는 사람은 필자든 편집자든 거의 없다. 그래서 양보해서 ‘복지국가’를 하나의 복합 명사라고 해두자.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에 그치지 않고 ‘복지국가건설’이라고까지 붙여 쓴다. 심지어 ‘복지국가건설계획’이라고까지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교, 기업, 행정 부서 등에서 나오는 수많은 보고서나 논문들을 보면 알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왜 사람들은 복합 명사가 될 수 없음이 명백한, 낱말들의 나열을 붙여서 쓸까? 그들이 띄어쓰기 규정을 잘 몰라서 그렇기도 하겠다. 또 띄어쓰기 규정이 모호하고 예외가 많아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위 6번 규정을 보라. 그 “특별한 경우”를 누가 규정할 것인가? 또 “적당히” 붙여 쓸 수 있다니? 세상에 어떤 법규나 규정에 “적당히”라는 말이 들어갈 수 있는가? 사실상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이 띄어쓰기를 안 지키고 못 지키는 근본적인 까닭은 띄어쓰기 규정 자체가 한글 표기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는 더 이상 띄어쓰기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는다. 특히 이동전화기에서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을 보낼 때는 띄어쓰기를 조금만 한다. 좁은 공간에 많은 글자를 써넣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한글 띄어쓰기가 지켜지지 않는 근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웬만한 문장은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아도 읽고 이해하는 데 별 지장이 없다. 그런데 뭐 하러 번거롭게 사이띄우개(스페이스 바)를 쳐 가면서 일일이 띄어쓰기를 하겠는가? 한글 띄어쓰기는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다.

 

 “나는지금수필을쓰고있다.” 이 문장을 금방 읽을 수 있겠는가? 난 가능하다고 본다. 이 문장은 어떤가? “Iamwritinganessaynow." 읽고 또 읽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똥 말 똥이다. 한국어를 낱말마다 띄어 쓴다는 띄어쓰기의 기본 규정은 영어나 다른 서양 말의 로마자 표기 규정을 그대로 받아온 것이다. 로마자는 풀어쓰기 때문에 단어마다 띄우지 않으면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한글은 음절 별로 모아쓰기 때문에 띄어쓰기를 별로 하지 않아도 읽기에 큰 지장이 없다. 더구나 단어마다 띄는 것은 쓰기도 불편하고 보기도 어색하다. “상 위 술 한 잔” 한 자씩 다 띄어야 하니 쓰기도 불편하고 보기도 궁색하다.

 

 이런 형편이니 필자들은 띄어쓰기를 잘 지키지 않고 편집자들은 옳은 띄어쓰기를 틀리게 고쳐 놓는다. 그래서 한글 띄어쓰기 규정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정이 까다롭고 예외가 많아서 그렇다기보다는, 그 점도 사실이기는 하나, 규정 자체가 한글 표기와 어울리지 않는 이유가 더 크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일본처럼 한자를 섞어 쓰고 아예 띄어쓰기를 하지 말까? 그럴 수는 없다. 북한처럼 띄어쓰기를 지금 보다 덜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다섯 자까지는 붙여 쓰고 여섯 자부터 띄어 쓰면 어떨까 사석에서 우스개삼아 말 한 적도 있다. 그러면 ‘복지국가’는 되고 ‘복지국가건설’은 안 될 것이다.

 

 억지스러운 말 같기는 하나, 띄어쓰기의 목적 자체가 글을 읽기 쉽고 쓰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안 될 일도 없다. 띄어쓰기 규정이 바뀔 가능성은 오랫동안 없을 테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위 생각들이 반영되어야 하리라 본다. 그 동안 나는 띄어쓰기 규정을 제대로 못 지키고 “적당히” 글을 쓸 것이지만, 그래도 나의 어쩔 수 없는 모범생 기질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지키게 만들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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