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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의학 용어가 어려운 이유 - 서경아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16. 11. 28.


의학 용어가 어려운 이유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3기 서경아 기자

calum0215@gmail.com


Moderate fatty liver, grade 3.
Renal cyst, left


한 인터넷사이트에 올라온 글 일부이다. 컴퓨터 단층(CT) 촬영 소견이 의학 용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며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은 글에 달린 어느 의사의 답변이다.


‘중등도의 지방간이 있고, 좌측 신장에 낭종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병원에서 듣는 의학 소견도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문장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두 번째 문장과 같은 말이었다면 그나마 어림짐작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바로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렇다면 다음 문장은 어떤가.


‘중간 정도의 지방간이 있고, 왼쪽 콩팥에 물혹이 있다.’


 앞의 문장들보다 한결 편하게 들린다. 왜 의학 용어는 어려운 외래어와 낯선 한자어로 이루어져야만 할까?

▲ 은희철 교수의 강의하는 모습

지난 14일 한글문화연대에선 “우리말 의학 용어 만들기: 순화와 제작”을 주제로 알음알음 강좌가 열렸다. 서울대학교 의대 은희철 명예 교수를 모시고 진행된 이번 강좌에선 의학 전문용어 순화 과정과 그 사례, 전문가의 사명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본 기사에선 이 강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우리말 의학 용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리말 의학 용어란...

우선, “우리말 의학 용어”가 정확히 무엇인지부터 정의해보자. “의학 용어”는 기본적으로 라틴어에 기초한 서양 의학 용어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선 전통의학이나 한의학을 제외하고는 현대 의학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순수 우리말의 전문 의학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말 의학 용어”란 서양 의학 용어의 우리말 대응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아시아문화권에서 서양 의학을 가장 먼저 주도적으로 받아들이고 한자에 기초하여 대응어를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영향 아래 일본식 한자로 이루어진 의학 용어를 그대로 들여와 사용하였고,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의학 용어는 라틴어와 일본식 한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말 의학 용어로의 순화”는 왜 필요한 걸까? 현재 의학 용어엔 잘 쓰이지 않고 어려운 한자가 많아 그 뜻을 알기에 쉽지 않다. 또한, 국내 의학 연구 논문이나 학회지가 대부분 영문으로만 발간되어, 우리의 우수한 의학 연구 결과의 한글 원문이 없고 한글로 검색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machanism’이 ‘기전, 기서, 기작’으로 사용되는 것을 ‘작동과정’으로 통일하듯이, 같은 용어의 같은 의미를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다르게 사용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체계 통일’로서도 의학 용어의 순화는 필요하다.


어려운 한자어나 한자 동음이의어를 고유어나 쉬운 한자로 바꾸고, 음차 용어는 우리말로 제작하거나 전환하여 이를 함께 적거나 권장용어로 지정하는 것이 우리말 의학 용어로의 순화 과정이다. 순화의 목적은 무분별한 고유어 사용이 아니라, 더욱 쉽고 편한 용어로의 전환에 초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창은 여드름으로, 가피는 딱지로, 반흔은 흉터로
이제 이와 같은 순화 과정을 거친 후 ‘잘 정착된 순화 사례’와 ‘저항이 심한 순화 사례’를 살펴보자. ‘잘 정착된 순화 사례’엔 익숙한 기존 고유어를 그대로 사용한 사례도 있다. ‘좌창’은 ‘여드름’으로, ‘가피’는 ‘딱지’로, ‘반흔’은 ‘흉터’로 바뀐 것이 그 예이다. 두 번째로는 같은 의미의 쉬운 한자어를 사용한 경우다. ‘심상성’은 ‘보통’으로 ‘길항작용’은 ‘대항작용’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론 기존 한자어가 매우 난해한 경우이다. ‘루(瘻)’는 ‘샛길’로, ‘횡렬조갑증’은 ‘손발톱세로갈림’으로, ‘어린선’은 ‘비늘증’으로, ‘경성하감’은 ‘굳은 궤양’으로 바뀌었다.


반면 ‘저항이 심한 순화 사례’엔 고유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거나 기존 한자어가 쉬우며 친숙한 경우 혹은 고유어 사용으로 길어진 음절 수에 대한 저항감이 큰 경우가 있다. ‘실조증’을 ‘조화운동 못함증’으로, ‘무갈증’은 ‘목마름없음증’으로 바꾸지 못하는 이유이다. 또한, 골다공증, 치매, 천식과 같이 용어가 어려운 한자어이지만 방송 매체를 통해 이미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예도 있다. 이 밖에도, 제시된 번역어가 원어의 개념전달에 문제가 있거나 관련 용어들과의 통일성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또는 ‘제모술’을 ‘털제거술’이라 부르지 않듯이 개원 수입에 연관이 깊은 용어들의 경우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여러 사례를 분석하여보면 우리말 의학 용어로의 순화가 순조롭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알 수 있다. 은희철 교수는 다음과 같은 간이평가표를 순화의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위의 표와 같이 순화 지침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정리하면 순화된 전문용어의 근거를 마련하고 순화 작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은 교수는 전문의 입장에서, 실제 우리말로 만든 용어와 원어의 개념이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평가하는 ‘개념 일치성’을 특히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였다.


끊임없는 토론과 갈등, 그래도....

이렇게 의사협회 용어 위원회를 중심으로 의학 용어 개정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까진 어려움이 많은 상황이다. 5-10년 단위로 의학용어집 판이 제작되어왔고 현재 6판을 제작 중이지만 끊임없는 갈등과 반발로 인해 2009년 5판에선 일부 권장용어는 한자로 복원되기도 했다.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측의 계속되는 반발에, 우리말 의학 용어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입장은 반복 토의에 염증을 느끼고 추진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라 한다. 이러한 상황의 원인은, 다양한 분과 학회의 전문의들이 자신들이 속한 영역의 의학 용어 개정에선 특히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에 있다. 다른 영역의 의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 개정엔 관대한 반면 자신의 의학 분야에는 보수적이다 보니 분과 학회끼리의 갈등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용어 위원들의 한계점도 문제로 여겨진다. 우연하고 관행적인 임용과 임기제로 인해 위원이 매번 바뀌다 보니 책임감과 추진력이 다소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체계적인 교육이 부족하고 효율적인 정보 교류가 미비하며, 의료 업무의 폭주로 인해 위원회의 일을 수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고, 현재 의사 시험에만 적용되고 있는 우리말 의학 용어의 의무적 사용을 전문의 시험, 잡지, 교과서 등으로 넓혀 나가야 함이 자명하다.
 
익숙함을 바꾸려는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의학 용어를 우리말로 순화시키는 일은 익숙함에 대한 도전이고 반발이다. 관심 받지 못하는 도전엔 칭찬보단 아픈 말이 더 많이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노력이 있기에, 누군가는 더 쉬운 말로 의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며, 나아가 내일의 의학 발전을 위한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은희철 교수는 용어에서 전문가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며 강좌를 마무리했다.


“전문가는 우리말 발전의 최전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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