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작가협회-방송작가 2018년 8월호]에 실린 글
우리가 문자 생활에서 쓰는 한글 조합이 2,350여 자인 데 비해 한자는 480여 개 소리만 표현하기 때문에 외국어나 한국어의 소리를 모두 적지 못한다. 선동 정치가를 뜻하는 ‘데마고그’ 같은 말만 해도 귀로 들었을 때는 ‘대마불사’ 비슷한 ‘대마고구’인가 싶지만, 글자로 적어 놓으면 우리네 한자말이 아니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자주 하다 보면 그 반대편의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한자말이 아님에도 한자말이라고 오해하는.
선거철이면 자주 듣는 ‘마타도어’. 근거 없이 남을 모략하는 짓을 뜻하는 이 말은 한자로 그 음을 표현할 수 있는 터라 한자 4자성어일 거라고 흘려 넘기기 쉽다. 하지만 이 말은 투우사를 뜻하는 스페인어 ‘메타도르(matador)’에서 유래하였다. 허공 속에 빨간 천을 흔들어 소를 유인하고 마침내는 지친 소의 정수리를 찔러 죽이는 투우사의 술책에 비유한 말이다. 산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쓰는 ‘비박’도 비슷한 착각을 부른다. ‘아닐 비(非), 머무를 박(泊)’일 거로 추정하는 이 말은 등산 도중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데서 침낭 등에 의지해 밤을 지새우는 일이지 아예 잠도 안 자고 산을 탄다는 뜻은 아니다. 독일어 ‘비박(biwak)’에서 왔으며, 우리말로는 한뎃잠 또는 한둔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소리를 한자로 적을 수 있을 것 같아 한자말이라고 오해하는 토박이말도 많다. 두뇌 활동을 뜻하는 ‘생각’이 가장 대표적인 예로, 흔히 ‘날 생(生), 깨달을 각(覺)’일 것이라고 엉터리 추측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생각’은 토박이말이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신분이나 지위를 뜻하는 ‘지체’, 옆에서 여러 가지 시중을 든다는 ‘수발’, 사물이나 공간의 한가운데를 뜻하는 ‘복판’, 도구나 수단의 뜻을 지닌 ‘연장’, 엉성하여 빈틈이 있다는 ‘허술’, 어떤 문제로 속을 태운다는 뜻의 ‘근심’, 아주 값진 물건인 ‘보배’ 따위가 다 그런 토박이말이다.
본디는 토박이말인데 한자로 소리를 따서 표기한 바람에 국어사전에 한자말로 강제 편입된 낱말들도 있다. 귀띔 말과 사전에 실린 한자를 함께 적으면 이렇다. 거창(크다, 巨創) 건달(주먹패, 乾達), 고생(힘들다, 苦生), 곡식(쌀보리, 穀食), 금방(방금, 今方), 노곤(피곤, 勞困), 대감(마님, 大監), 도배(벽지, 塗褙), 미안(죄송, 未安), 방석(깔개, 方席), 변(변두리, 邊), 변덕(팥죽, 變德), 부대(자루, 負袋), 분부(명령, 吩咐), 불한당(도둑떼, 不汗黨), 사공(배, 沙工), 사돈(부부, 査頓), 사랑(사랑방, 舍廊), 사발(그릇, 沙鉢), 상전(윗사람, 上典), 성화(애가 탐, 成火), 영감(나리, 令監), 왕(큰, 왕고집, 王), 우선(먼저, 于先), 장(5일장, 場), 장작(나무, 長斫), 전갈(안부, 傳喝), 주전자(물, 酒煎子), 진하다(짙다, 津--), 천장(지붕, 天障), 타작(농사, 打作) 따위다.
외국어에서 온 말을 우리 토박이말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6·25전쟁 당시 북쪽의 인민군 편에서 활동하던 비정규 유격대원을 가리키던 ‘빨치산’은 프랑스어 ‘빠르띠장(partisan)’에서 왔다. ‘빨갱이’라는 말과 주로 산에서 활동하던 특성이 겹쳐져 우리말로 착각한다. 은어쯤으로 여기는 ‘삐라’는 전단, 벽보 등을 뜻하는 영어 ‘빌(bill)’의 일본어 발음 ‘비라’가 된소리로 변하여 자리 잡은 낱말이다. ‘폼 난다, 폼 잡는다’고 말할 때 ‘폼’은 영어 ‘form’을 들여다 쓴 것이고, 길바닥 맨땅에 만들어 둔 ‘맨홀’은 ‘맨발, 맨밥, 맨손’과 아무 상관 없는 영어 ‘manhole’, 즉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다.
거꾸로, 우리 토박이말임에도 흔치 않은 모양이나 어감 때문에 외국어로 착각하는 말도 있다. 서양식 혼례에서 신랑 신부를 이끌고 거들어주는 사람을 뜻하는 ‘들러리’가 ‘갤러리’ 때문에 그런 오해를 받고, 오목하고 길게 패인 줄을 뜻하는 ‘홈’도 영어 ‘home’ 때문에 오해를 받지만 토박이말이다.
이밖에도 어원을 잘 모르고 쓰는 말도 많다. 증권가에 나도는 ‘찌라시’는 일본어로 ‘뿌리다’라는 뜻의 ‘지라스(散らす)’의 명사형이다. ‘머플러(mufffler)’가 ‘마후라’로 바뀐 이력 때문에 일본어일 것으로 추측하는 ‘아우라’는 원래 그리스말이다. ‘아우라(aura)’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예술 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면서 널리 퍼졌다. 군대 용어 ‘총기 수입’의 ‘수입’은 영어 ‘스윕(sweep, 쓸다)’의 변형일 것으로 추측하지만, 사실은 손질을 뜻하는 일본어 ‘떼이레(ていれ, 手入)’의 한자를 우리 식으로 읽은 것이다. 일본어처럼 보이는 ‘메리야스’의 어원은 스페인어로 양말을 뜻하는 ‘메디아스(medias)’로 추측된다. 당구에서 요행히 맞은 공을 뜻하는 ‘후루꾸’는 영어 ‘플루크(fluke)’가 일본에서 변형되어 들어온 말이다. ‘팬(fan)’을 ‘후앙’이라고 부르던 것과 같은 변형이다.
새로운 문물과 함께 말이 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지나친 외국어 쏠림 때문에 우리의 말 재산을 잃거나 새 말을 만드는 창의력을 잃어선 곤란하다. ‘레시피’에 밀려 ‘조리법’이 사라지고 아무 곳에나 ‘비주얼, 콜라보’를 갖다 붙이는 싸구려 세태는 확실히 걱정스럽다. 이는 한국어 족보에 문화 다양성이 아니라 ‘문화 사대’라는 꼬리표를 붙여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밀당, 꿀잼’과 같은 발랄한 새말을 반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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