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말이 그렇구나(1)

 

약속에 늦어 서두를 때 빨간 신호등 앞에서 시간을 끌게 되면, 차라리 ‘신호등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신호등이 없다면? 물론 걷는 이들은 횡단보도조차 마음놓고 건너다닐 수 없게 되지만, 차를 모는 이들도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선 덩치가 큰 차들이 제멋대로 길 위를 누빌 터이고, 다음에 운전 솜씨가 뛰어난 운전자들만이 겨우 제 시간에 맞춰 옮겨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은, 대다수의 작은 차를 탄 운전자들은 자칫하면 길 위에 고립될지도 모른다. 시내 지리에 어두운 다른 지방 사람들이나 외국인들은 아예 차를 몰고 길에 나설 엄두를 못 내리라. 운전자들에게도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질서와 규범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호등은 필요하며, 도로교통법도 필요한 것이다.


말살이에서는 어떤가? 말을 할 때, ‘그건 잘못 된 말이야’ 하는 지적을 받으면 짜증이 난다. 누구나 ‘빳데리’라고 하는데, 왜 굳이 ‘배터리’로 어색하게 말해야 하지? ‘나는 새도 떨어뜨리다’보다는 ‘날으는 새도 떨어뜨리다’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수십 년 동안 써 온 말이 어느 날 틀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걸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하며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망설이지 말고 바로잡아 써야 한다. 말은 개인이 구사하지만 개인의 것이 아니며, 누구나 말할 권리는 있지만 올바르게 말할 의무도 있다.


말은 소리로 전해져 이내 허공에 흩어지고 말지만, 그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말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고유 문화의 산물이며 후손 세세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문화 유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화 유산을 지키고 가꾸지 않으면 후손에게 물려주려야 줄 수 없다. 주 시경 선생은 백여 년 전에,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고 하셨다. 말의 규범을 무시하는 것은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과 한가지다. 그래서 우리말의 질서를 ‘표준어 규정’으로 정해 이를 지키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글살이에서는 또한 어떠할까? 글자를 적는 규범에 이르러서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아직 우리 국민들은 한글 철자법을 어려워하고 있다. 나라 안의 거의 모든 신문사들은 띄어쓰기를 무시한 채 신문을 찍어내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금의 기성 세대가 학교 교육을 통하여 ‘한글 맞춤법’을 익힌 첫 세대이며, 이 짧은 연륜이 오랜 한자 문화의 굴레에서 말글살이의 홀로서기를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한자 섞어 쓰기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며, 요즘에는 영어 공용어 주장까지 세계화의 큰 물줄기를 타고 세력을 넓히고 있다. 한글 맞춤법을 들먹이는 자체가 시대 발전에 뒤진 국수주의자 취급을 당하는 판이다.


그러나 글자를 올바로 적는 규범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글이 만들어져 나라글자로 공포된 지가 오백오십칠 년이 넘었다. 그러나 천년을 넘게 써 온 중국글자(한자)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하여 한글 적는 규범(‘한글 맞춤법’)을 마련한 지는 이제 겨우 칠십 년이 되었을 뿐이다. 조선어학회 총회에서 한글 맞춤법의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한 1930년 12월부터, 김 윤경․이 극로․이 병기․정 열모․신 명균․이 윤재․최 현배․이 희승․장 지영 등 당대 최고의 조선어(한국어)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세 해에 걸쳐 125 차례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다. 이 통일안이 지금의 한글 맞춤법(1988, 문교부 한글 맞춤법)으로 일부 수정되어 우리 글자살이의 규범으로 자리하여 있다.


글자 적는 규범이 없었던 시대에는, 글자를 쓰는 이들마다 글자의 꼴과 쓰는 방식이 제각각 달랐다. 하나의 사물이나 개념이 여러 가지 낱말로 적혀 혼란을 주기도 하고, 하나의 문장이 이해 관계에 따라 이리도 풀이되고 저리도 풀이되었다. 낱말들을 거의 붙여 쓰다 보니, 글을 읽고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어 우리 글을 정리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도 안정되고 체계적인 글살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글 규범은 교육, 언론, 출판을 비롯한 모든 문화 생활의 바탕이 되므로, 우리가 문화 민족임을 자부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우리는 지금 지구촌 주민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 곳곳을 마음대로 오가며 살고 있다.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나라 안팎에 수없이 많으며 해마다 늘고 있다. 이미 세계 곳곳에 한글학교가 2000 곳이 넘게 생겼다. 우리가 말글 규범에 따라 말글살이를 통일하지 않으면, 이 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우리 말글을 배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세계의 모든 언어에는 나름대로의 체계와 규범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나라 말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말 규범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면, 각각 바른말(규범 언어)과 바르지 못한 말로 자기의 목소리를 따로 녹음하여 다시 들어 보라. 만일 띄어쓰기가 번거롭다고 느껴질 때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던 옛 시대의 글을 찾아 읽어 보라. 말과 글의 규범은 그 말과 글을 쓰는 이들을 골탕 먹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편리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 성기지 지음 『아, 그 말이 그렇구나!』(2004, 디지털싸이버), 58~60쪽

 

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