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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넘쳐나는 로마자 약칭, 잘 만든 우리말 약칭으로 대응하자! - 권나현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23. 2. 7.

넘쳐나는 로마자 약칭, 잘 만든 우리말 약칭으로 대응하자!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9기 권나현 기자
nahyunia@naver.com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 언론 보도에서 거의 매일 볼 수 있는 로마자 단어가 있다. 바로 세계보건기구 ‘WHO’다. 주로 글의 앞부분에서 ‘세계보건기구(WHO)’처럼 한글 명칭 뒤에 로마자 약칭을 덧붙여 쓰고, 그 뒤로는 로마자 약칭 ‘WHO’만 적는다. ‘세계보건기구’라는 정식 명칭은 보도자료나 공문서에 반복해서 쓰기엔 다소 길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도자료나 공문서 등에서는 국제기구, 경제용어, 공공기관 등의 명칭을 짧게 줄여 쓰기 위해 로마자 약칭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언어의 경제성을 추구하려는 목적이라면, 우리말로 된 약칭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로마자 약칭을 우리말 약칭으로 바꿔 사용하자고 하는 이유는 단순히 로마자 사용을 반대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로마자 알파벳의 글자 자체에는 뜻이 없다. 따라서 별다른 설명 없이 로마자 약칭만 써둔다면 각 알파벳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없다. 비교해보자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각각 ‘식약처’, ‘MFDS’로 줄일 수 있다. 우리말 약칭 ‘식약처’에서는 식품이나 약품을 관리하는 기관이라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MFDS’라는 로마자 약칭에서는 각 알파벳이 가진 의미를 전혀 알아챌 수 없다. ‘CPR(심폐소생술)’과 ‘AED(자동심장충격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최근 언론 보도에서는 심폐소생술이라는 정식 명칭을 언급하지 않고 ‘CPR’이라는 로마자 약칭만 쓰인 경우도 많았다. ‘CPR’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시청자는 이 보도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AED’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동심장충격기가 긴급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처럼 로마자 약칭은 언어의 경제성을 빌미로 오히려 본래의 소통 기능을 떨어뜨린다.

문제는 이러한 로마자 약칭이 국민이나 불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쓰인다는 점이다. 공문서나 언론 보도가 전달하는 중요한 정보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러나 공문서와 보도자료에 로마자 약칭이 무분별하게 쓰인다면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발생할 뿐 아니라, 누군가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로마자를 잘 알지 못하거나 로마자 약칭의 뜻을 검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2014년 3월, 법제처는 긴 법률명의 공식적인 약칭을 제정하기 위해 ‘법률 제명 약칭 위원회’를 구성했다. 여러 공공기관이나 언론사에서 동일한 법률명을 다르게 약칭해 혼란이 생기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음절을 축약해 만든 약칭이 아닌, 위원들 간의 협의를 거쳐 법률 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담아낸 약칭을 제정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이는 법률명뿐만 아니라 단체나 기관의 이름을 줄이는 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간결하고 거부감이 없으면서, 단체의 의미가 줄임말 안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한글문화연대’의 약칭은 ‘한글연’이지만, 한 언론 보도에는 임의로 ‘한문연’이라고 줄여 표기된 바 있다. ‘한글연’이라는 약칭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말 약칭은 그저 단어의 첫음절을 따서 만드는 것으로 여기는 무관심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문연’이라는 약칭에서는 한글을 사랑하고 지키는 단체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말 약칭을 제정할 땐 그 단체의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들여 만든 우리말 약칭은 잘 알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기관과 정부, 언론 등 공신력 있는 단체의 협력이 필요하다.

‘미 연방준비제도’는 로마자 약칭 ‘FED’로 표기되지만, 우리말 약칭인 ‘미 연준’도 널리 쓰인다. 우리말 약칭 중에서 ‘민주노총’, ‘전경련’은 정식 명칭보다 약칭이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한국철도공사는 그동안 사용해오던 로마자 약칭 ‘KORAIL’을 우리말 약칭 ‘한국철도’로 변경했다. 이처럼 적절한 우리말 약칭을 제정해두면 로마자 약칭보다도 더욱 대중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넘쳐나는 로마자 약칭에 대응하려면 제대로 된 우리말 약칭을 많이 확보해두어야 한다. 로마자 약칭이 야기하는 정보 접근의 어려움을 없앨 수 있도록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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