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알면 낱말 이해에 얼마나 도움 될까?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교육부가 중·고교 교과서에서조차 사라진 한자를 2018년부터 초등 교과서에도 집어넣는 방침을 검토한단다.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생각이 매우 혼란스럽다. 교육부 방침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떤 이는 ‘한자를 모르면 낱말의 뜻을 알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그와는 결이 좀 다르게 ‘한자를 알면 낱말 뜻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며 교육부의 한자 병기 방침을 옹호하는 분도 있다.
한자를 모르면 낱말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는 오류다. 한자를 모르는데도 뜻을 아는 낱말 하나만 대면 이 명제는 거짓으로 판명 난다. 예를 들어 주로 노인에게 나타나는 ‘치매’가 한자로 癡매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 한자를 몰라서 치매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 세계의 체험과 대화에서 낱말의 뜻을 익히고 새로운 말은 사전이나 남의 설명을 접한 뒤 다양한 언어활동과 문맥의 이해를 거치면서 더 풍부하게 알아간다.
한자를 모르면 낱말 뜻을 모른다는 주장은 옛날 신문처럼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쓰자고 요구하는 국한문 혼용론자들이 퍼뜨린 미신이다. 특히 산부인과 의사나 안중근 의사의 ‘의사’처럼 소리가 같고 뜻이 다른 말은 한자로 적지 않으면 뜻을 혼동하게 된다고 핏대를 세우는데, 이런 대목에서 사람들이 혹하기 쉽다.
“인사과장은 사장님 앞으로 달려가 인사를 했다”라는 문장에서 앞뒤의 ‘인사’를 한글로만 적어놓으면 헷갈린다고 하니 국한문 혼용으로 적어 보자. “人事과장은 사장님 앞으로 달려가 人事를 했다.” 고약하게도 두 낱말은 한자마저 같다. 국한문 혼용론자 가운데 이 문장의 뜻을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두 낱말의 차이를 알아냈을까? 당연히 앞뒤 문맥을 보고 알아채는 것이다. 소리만 나오는 라디오를 들을 때도 산부인과 의사와 안중근 의사를 혼동하는 사람은 없다.
이들의 엉터리 주장과 다르게, ‘한자를 알면 낱말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는 평범한 시민들의 평범한 믿음이다. 사랑 애와 나라 국을 알면 애국이 곧 나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식이다. 실제로 한자음에 붙어 있는 뜻이 한자어의 뜻을 추적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한자어 낱말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한자 지식이란 한자를 쓰거나 읽을 줄 아는 지식이겠는가, 아니면 한자의 뜻에 관한 지식인가? 당연히 한자의 뜻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니 애국과 애족의 ‘애’가 모두 사랑이라는 같은 뜻을 지닌 한자라고 알면 되지 반드시 ‘愛’를 쓸 줄 알아야 한다거나 한자로 적어놓고 읽게 강제할 까닭은 없다. 한자를 쓸 줄 알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낱말 이해에 차이가 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믿음에도 꽤 큰 함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애인’이라는 말의 사랑은 ‘애국’의 사랑과 결이 몹시 다르고, ‘창문’은 낱낱의 한자가 지닌 뜻을 합치면 다시 ‘창문’이다. 게다가 ‘재물’이라는 한자어는 재물 재에 물건 물이라는 한자의 조합인데, 낱낱의 한자 뜻을 다시 분해해도 재물 재에 물건 물, 물건 물에 물건 건이라 무한한 동어반복만 일어난다. 심지어 ‘선생’은 먼저 태어난 사람이고 ‘제자’는 아우의 아들이 되니, 한자의 뜻을 기계적으로 묶어서 낱말의 뜻에 다가가려는 태도는 게으르고 위험한 공부법이다. 더군다나 ‘사회’나 ‘회사’, ‘미분’과 ‘적분’처럼 낱말 뜻의 껍데기 정도만 표현하는 한자어도 숱하다. 한자를 아는 게 낱말 뜻 이해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 이 글은 2014년 11월 4일, 경향신문에 실린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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