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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여기 한국 맞죠?... 한글 간판이 보고 싶어요 - 누리보듬

by 한글문화연대 2023. 10. 4.

여기 한국 맞죠?... 한글 간판이 보고 싶어요

한글문화연대 9월 조별 기사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10기 누리보듬

(강민주, 김민지, 안지연, 윤혜린, 이성민)

 

 

서울 연남동의 한 카페 앞, 50대 여성 두 명이 발걸음을 멈췄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가게 간판 이름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엠지세대 트렌드를 좇아 이색 디저트를 맛보려고 방문한 연남동. 커피 한 잔 하려고 카페를 찾았지만, 읽기 힘든 로마자 간판 때문에 선뜻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펠른’, ‘티크닉’, ‘플루밍’, ‘누크녹’, ‘세빠띠’⋯ 모두 카페 또는 디저트 가게의 이름이다. 어느 나라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간판 대부분이 로마자로 표기하거나, 외국어 발음을 그대로 적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로는 올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딸네가 종종 사다주던 디저트를 직접 매장에서 먹어보고 싶었다. 같은 나이대의 친구 한 명을 데려와 함께 돌아다녔지만, 가게를 바로 앞에 두고 주춤할 수밖에 없다.

 

입구에 놓인 작은 메뉴판도 온통 로마자다. ‘크런치아인슈페너’, ‘크렘드라크렘’, ‘오트슈페너’, ‘cortado’, 'einspanner'⋯ 심지어는 한글로 된 가게 이름을 로마자 표기로 바꿔 메뉴에 붙였다. 'ZAKDANGMOI PLATE', 'Tiraamisu', 'ZAKDANGMOI Dacquoise'⋯ 어떻게 발음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메뉴인지 알아보기도 힘들다.

결국 발걸음을 돌려 프랜차이즈 커피점으로 갔다. 동네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벅스’. 평소에 매일 마시는 아메리카노 대신 색다른 메뉴를 먹어보고 싶었다. 시원한 과일 음료에 구미가 당기는 날. ‘퍼플 드링크 위드 망고 용과 리프레셔’, ‘레드 파워 스매시 블랜디드’, ‘브라운 슈가 오트 쉐이큰 에스프레소’⋯ 메뉴판을 훑다가 결국 평소와 같이 아메리카노 한 잔에, 카페 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뿐만 아니라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로마자로 된, 혹은 로마자를 한글 발음으로 표기한 이름 때문에 메뉴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어렵다.

 

 

외국 문자로만 적힌 간판…사실상 위법?

 

카페와 식당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외국 문자, 특히 로마자로 적힌 간판들에는 사실 위법 소지가 있다.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 제12조 3항에 따르면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춰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외국 문자로 표기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 법 에다 이미 간판 속 한글 표기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음에도 외국 문자로만 적힌 간판이 수두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서 언급한 ‘특별한 사유’에서 찾을 수 있다. 2022년 발행된 옥외광고물 법령 해설집에 따르면, 상표법에 따라 특허청에 외국 문자로 등록된 상표를 그대로 표시할 경우에는 외국 문자만 쓰인 간판을 걸어도 위법이 아니다. 대다수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이에 해당하므로 그만큼 쉽게 외국 문자로 된 간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상공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어떨까? 이 경우에는 관리법 시행령 등을 적용하지만 복잡하고 세밀한 규제가 실질적으로 어렵고, 이들만 제지하는 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렇기에 사실상 위법임에도 불구하고 한글 표기 없이 외국 문자로만 적힌 간판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가게 안 메뉴판까지도 한글로만 표기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연남동 카페 거리…로마자 간판 천국

 

서울에서도 로마자 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연남동 카페 거리를 방문했다. 다음은 지난 3일 로마자 간판을 단 연남동의 한 유명 카페에서 주인과 나눈 이야기다.

 

1. 메뉴판에 로마자가 많은데 이유가 따로 있는가?

- 연남동 거리에는 외국인 손님들이 많다 보니 메뉴명을 로마자로 적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모든 직원이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다보니 티 메뉴가 로마자로 적혀 있으면 손님들이 한번에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관광객들에게 안내하기 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2. 로마자로 된 메뉴판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손님은 없는가?

- 보통은 한국 사람들이 다시 묻는다. 예를 들어 우롱티의 경우 발음과 표기에서 차이가 있어 뭐냐고 다시 물어보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3. 만약에 메뉴판을 전부 한글로 바꾸면 어떨 것 같은가?

- 아마도 이 거리에서 장사하려면 아예 한글로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카페에는 고유의 톤앤 매너(분위기)가 있다. 그러다 보니 변경했을 때 그런 감성적인 측면도 타격을 받을 것 같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해당 카페는 간판뿐 아니라 메뉴판마저 전부 로마자로 적혀 있어 아주 간단한 주문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손님을 찾아볼 수 있었다. 다음은 해당 카페에서 로마자로만 표기된 메뉴판을 보며 주문을 망설이던 한 대학생과의 일문일답이다.

 

1. 전부 로마자로 적힌 메뉴를 보았을 때 어떠한 기분이 들었나?

- 어떤 메뉴부터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해당 메뉴가 무슨 메뉴인지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고 주문하기가 어려웠다.

 

2. 메뉴판을 전부 한글로 적으면 어떨 것 같은가?

- 메뉴에 대한 정보가 한눈에 들어올 것 같고 로마자로만 적힌 것보다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외국인 손님들도 있을 수 있어 전부 한글로 적기보다는 한글 표기를 위주로 하되, 괄호 안에 로마자를 병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3. 프랜차이즈 카페의 메뉴 이름을 보면 어떤 메뉴인지 한 번에 짐작이 가능한가?

- 초코, 스무디, 프라페 등의 단어는 아무래도 여러 카페에서 사용하는 메뉴이다 보니 대충 짐작이 가는데 그 외에 신 메뉴들 이름에 장황하고 어려운 단어들이 섞여 있을 경우에는 짐작하기 어렵고 무슨 맛일지 상상이 전혀 안 가는 경우도 많다.

 

해당 카페는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카페로, 간판과 메뉴판 전부 로마자로만 표기되어 있었다. 카페 측은 외국인 손님 유치와 카페의 위치적 특성을 이유로 로마자 표기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지만, 한국인 손님들은 로마자로만 모든 것이 적힌 가게는 이용하기 어려우므로, 한글 표기가 꼭 같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형 프랜차이즈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 로마자 간판

 

프랜차이즈 매장 점주의 인식은 어떠할까? 정재철 ‘공차’ 신촌연세로점 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1. ‘Gongcha’ 대신 한글로 ‘공차’라고 간판을 바꾼다면 어떨 것 같은가?

- 중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자국어를 반드시 일정 크기로 적고 소수민족 언어를 같이 표기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우리 매장처럼 외국인이 자주 방문하는 상점은 영어로 된 간판이 필요하니 한글 간판 아래 영어로 적어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2. 음료 이름이 어려워서 주문에 곤란함을 겪는 손님은 없는가?

- 대한민국처럼 영어교육에 열을 올리는 나라도 많이 없다. 젊은 층에서는 영어 사용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크게 지장이 없다. 다만 노년층에서 어려움을 겪는데, 이 경우 우리 매장에서는 보통 음료의 특색이나 맛을 설명해드려 고객의 이해를 돕는다.

 

3. 만약 사장님은 음료 이름을 한글 표기로 바꿀 수 있다면 바꿀 의향이 있는가?

- 한글로 바꾸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문제다. 자칫하면 제품의 가치가 낮아져 보이거나 판매량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세련되며 제품과 브랜드에 맞는 한글 어휘를 찾아낸다면 한글로 바꿀 의향은 있다.

 

4. 향후에도 음료 이름이 외국어로 작명되거나 로마자 표기로 출시되어야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스무디를 어찌 한국어로 표기해야 할까? 대중화된 한국어 대체어가 없다. 결국 소비자의 이해를 도와야 하는데, 외국어를 사용해야 이해가 빠르다면 결국 외국어를 써야 한다. 과도한 외국어 사용은 물론 큰 문제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한국어 사용 강제도 문제를 야기한다.

 

이 밖에도 정 사장은 “과도한 로마자 사용은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외래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는 복합적 요인이 존재한다. 그러니 한글과 로마자가 함께 사용되는 것에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본인과 같은 자영업자들 스스로 제품과 홍보 부분에서 세련되고 유려한 한국어 표현을 찾고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태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 이미 법령으로 한글 간판을 사용하도록 규제하고는 있지만, 대형 가맹점이라면 외국 문자로 표기된 간판에 한글을 병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사실상 규제가 큰 의미가 없다. 거리에는 소상공인의 가게뿐만 아니라 외국계 대형 가맹점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상공인만을 규제하는 것은 시행령의 원래 취지에 벗어나고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이 가게가 어떤 곳인지,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모든 이가 평등하게 알게 하려면 외국 문자로 된 간판에도 똑같이 한글 표기를 적용하도록 규제를 바꿔야 한다.

 

메뉴판 또한 간판과 마찬가지로 규제 대상에 들어가야 한다. 아무리 간판에 한글이 병기되어도, 가게에 들어서서 본 메뉴판에 한글이 없다면 발길을 돌릴 손님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간판과 메뉴판에 한글을 쓰게 하는 목적은 어떤 손님이든 똑같이 가게를 이용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질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간판뿐만 아니라 메뉴판에도 한글 표기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

 

나아가 소비자도 우리말보다 영어를 더 자연스럽고 멋있다고 여기는 태도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흔히 영어 간판이나 메뉴판을 보고 ‘감성 있다’라고 평한다. 그 ‘감성’은 영어를 쓸 때만 얻을 수 있는 느낌인지, 한글로 표기하면 사라지는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처음의 50대 여성들에게로 돌아가 보자. 과연 그 둘만이 영어로 된 간판과 메뉴판에 곤혹을 느꼈을까? 그렇지 않다. 인터뷰 결과, 영어로 된 간판과 메뉴판을 어려워한 경험은 손님의 나이나 브랜드의 인지도에 상관없이 모두 존재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앞선 두 여성처럼 가게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읽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대신, ‘나 말고도 모두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가게가 필요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자연스레 거리의 간판에서 한글을 보기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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