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서퍼’가 ‘디지털 친화 어르신’? 실용성 낮은 순화어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10기 안지연 기자
‘실버 서퍼’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실버 서퍼(silver surfer)’는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노년층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렇다면 ‘디지털 친화 어르신’은 들어본 적 있는가? 두 단어 모두 처음 들어봤다면 둘 다 같은 개념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디지털 친화 어르신’이 ‘실버 서퍼’를 대체하는 순화어라는 점은 더더욱 알기 어렵다. ‘디지털 친화 어르신’을 구성하는 단어가 원래 단어와 연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리클라이너’의 순화어 ‘각도 조절 푹신 의자’는 순화어에서 원래 단어를 유추하기 더 어렵다. ‘리클라이너’의 개념을 일일이 풀어 쓰다 보니 생긴 일이다.
매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국립국어원(이하 국어원)과 함께 관련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새말모임’에서 외국어를 대체할 순화어를 제시한다. 2021년 새말모임에서 제시한 순화어는 71개다. ‘북 아트’는 ‘책 꾸밈’으로, ‘실버 서퍼’는 ‘디지털 친화 어르신’으로, ‘리클라이너’는 ‘각도 조절 푹신 의자’로 바뀌었다. 어려운 외국어를 순화어로 바꾸는 작업의 취지는 좋지만,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과연 이 순화어들이 그 전의 표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새말모임에서 제시한 순화어의 문제는 긍정적인 취지와 별개로 실질적인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순화어를 제안할 때마다 국민 이천여 명에게 물어 단어 순화의 필요성과 순화어의 적절성을 검증하지만, 정작 순화어가 실생활에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 기존 단어가 가진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며, 대체어가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새로 등장하거나 자주 쓰이는 외국어 표현을 순화하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국어원은 과거 ‘웹툰’을 ‘누리터쪽그림’으로, ‘블루투스’는 ‘쌈지무선망’으로 순화어를 제시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또한, ‘리유저블 컵’을 ‘다회용 컵’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다룬 기사에서는 ‘컵부터가 영어 아닌가’, ‘‘다회용(多回容)’도 한자인데 굳이 바꿔야 할까’ 등의 댓글이 달렸다.
이에 문체부 관계자는 “새말모임에서 전문가들이 대체어를 만들지만, 학문적이고 규범적인 틀 안에서 짓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선 대중들이 사용하는 말이 더 감각적일 수 있다”라며 “국민이 직접 제안한 말이 더 적절한 순화어가 될 수도 있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순화어 확산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코로나19가 퍼졌을 때 여행 활로로 주목받았던 ‘트래블버블’을 ‘비격리 여행권역’으로 순화했지만, 여행업계는 물론 관련 업무를 맡은 국토교통부도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국토부는 적극행정·규제혁신 우수사례를 소개하는 자료에서 ‘비격리 여행권역’ 대신 ‘트래블버블’을 그대로 사용했다.
실용성이 떨어지는 공공언어 개선 문제는 국정감사에서도 언급되었다.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1년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감에서 “등록된 순화어를 실제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단 지적이 나오지만, 실태조사 등 사후관리가 이뤄지지 않는다”라며 “실생활에 쓰일 수 있도록 양보다 질을 우선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장소원 국어원장은 “전문가 의견을 엄격하게 반영해서 순화어를 만들겠다”라고 답했다.
국어원은 대체 순화어를 선정하는 근거로 국민 선호도 조사를 제시한다. 적절성을 검증하는 설문조사에서 긍정 비율이 60% 이상이면 단어를 채택하는 식이다. 그간 제시된 순화어의 조사 통과율은 약 95%다. 그러나 조사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과 달리 순화어들이 실생활에 사용되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선호도 조사에서 외래어·외국어를 순화어로 바꾸는 것이 적절한가의 질문의 보기가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 △매우 그렇지 않다 5가지인데, 국어원은 ‘보통이다’까지 긍정 비율로 포함해 집계했다. 중립적 응답까지 순화어를 지지하는 집단으로 분류한 셈이다.
‘보통이다’로 답한 비율을 긍정적 집단에서 제외하면 2021년 하반기 제시된 25개의 순화어 중 11개가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오너리스크(owner risk)’를 예로 들면, 국어원이 대체어 ‘경영주발 악재’를 제시하면서 ‘적절하다’는 응답이 90%가 넘었다고 계산했지만, 실제로 ‘보통이다’를 제외하면 긍정적으로 응답한 비율은 47.9%에 그쳤다. 안개형 냉각(쿨링 포그), 동네생활권(하이퍼 로컬) 등의 순화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잘 정착한 순화어는 없을까? ‘리플(reply)’을 순화한 ‘댓글’은 좋은 반응을 얻어 지금은 모든 사이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또한, ‘네티즌(netizen)’을 순화한 ‘누리꾼’과 ‘올킬(all kill)’을 순화한 ‘싹쓸이’ 등의 순화어도 뉴스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즉, 모든 순화어가 현실과 동떨어진 형태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방탄소년단이 한글로 가사를 쓴 노래가 빌보드를 석권하고, 미국에서 '오징어게임'에 나온 한국어의 의미를 알아보는 등 한국어와 한글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정부 정책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외국어 표현을 단순히 일대일로 직역하는 수준의 순화를 넘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일상에 널리 쓰일 수 있는 순화어가 필요하다. ‘각도 조절 푹신 의자’, ‘디지털 친화 어르신’보다는 ‘댓글’, ‘누리꾼’처럼 누구나 알기 쉬운 순화어가 생겨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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