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있는 여성의 문자: 한글과 황실 사학의 숙명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12기 김서은 기자
한글은 지식과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던 시대에 ‘모든 이를 위한 문자’로 만들어졌다. 이는 한 민족이 스스로 문자를 만들고 지켰다는 상징이며, 동시에 억압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기록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이들의 도구였다. 특히 글을 배우기 어려웠던 여성들에게 한글은 세상과 연결되는 창이자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 남성 중심의 한문 문화 속에서 왕실 여성들은 한글을 활용해 자신의 삶과 내면세계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이들은 한문 대신 한글로 편지를 쓰고 일기를 남기며 개인의 가장 깊은 감정과 생각을 섬세하게 기록했다. 국문학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여성의 글쓰기'로 정의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글이 지닌 문자로서의 특성이다. 여성은 당대 지배적인 문자 체계였던 한문에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배우기 쉬운 한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했다. 이는 곧 공적 기록과 권위에서 배제된 여성이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를 통해 '허락되지 않은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자신만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 의미 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은 극도로 제한된 사회 구조 속에서도 한글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 영역을 당당히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계승한 교육기관이 바로 숙명여자대학교다. 숙명의 뿌리는 1906년 순헌황귀비가 설립한 명신여학교에서 시작된다. 고종 황제의 가장 높은 후궁인 귀비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는 명성황후 사후 사실상 황후로 대우받았던 여성이다. 그가 세운 명신여학교는 대한제국 황실의 공적인 지원 아래 여성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래서 숙명은 ‘황실 사학(皇室私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황실 사학’이라는 말에는 ‘국가의 품격과 여성 교양을 함께 책임지는 기관’이라는 깊은 역사적 상징이 담겨 있다.
대표적인 숙명의 스승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들 수 있다. 그는 20세기 초의 한국어 최고 권위자로서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해 역사적 과제 해결에 헌신한 인물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사용하는 철자법, 어휘, 현대 한글 표준화는 주시경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제자들이 이어받아 완성되었다. 주시경은 한국어와 역사, 지리를 가르치면서 숙명의 학생들에게 한글의 중요성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심어주었으며, 두 딸 솔뫼와 봄뫼를 숙명에 입학시킬 정도로 숙명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한글과 황실 사학. 언뜻 무관해 보이는 이 두 단어는 여성의 자기표현과 교양을 가능케 한 ‘문화 자산’이라는 점에서 만난다. 한글은 여성에게 글을 쓸 자유를, 황실 사학은 여성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주었다. 둘 다 여성이 자기 삶의 주체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그 길은 숙명여대라는 이름 아래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황실 사학의 전통은 단지 과거의 자랑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품격을 갖춘 여성’을 양성하겠다는 분명한 선언이었고, 지금의 숙명인이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품격 있는 언어란 나의 생각을 바르게 말하고 깊이 있게 쓰는 것이다. 품격 있는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 언어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권리’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이자, 동시에 우리가 어떤 가치를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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