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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은 눈에 보이지만, 이름은 종종 길을 잃는다
흔히 ‘곤색 니트’, ‘소라색 셔츠’, ‘세피아 톤 사진’처럼 색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유래가 어떠한지 따져본 적은 많지 않다. 색은 시각의 영역이지만, 그 이름은 언어와 역사가 겹겹이 쌓인 결과물임에도 말이다. 일상에서 관습적으로 쓰이는 색상명 속에 숨어 있는 언어적 오해와 경로를 살펴보자.
한자의 탈을 쓴 일본어: 곤색, 소라색, 기색
곤색과 소라색은 얼핏 한자어처럼 보이기에 우리말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곤색’은 진한 남색을 뜻하는 한자 감(紺)의 일본어 발음 ‘곤(こん)’이 그대로 굳어진 말이다. 한자 ‘감(紺)’ 자체는 고대 동양권에서 널리 쓰였기에 유서 깊지만, 이를 ‘곤’으로 읽는 것은 명백한 일본식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식 한자음인 ‘감색’ 혹은 ‘진남색’ 등으로 부르는 것이 올바른 순화 방법이다. 한국어에서 ‘소라’는 조개를 뜻하기에, 어린이들은 소라색을 ‘하얗거나 뽀얀 색’ 등으로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소라는 일본어 ‘소라(そら, 하늘)’에서 왔다. 즉, ‘소라색’은 ‘조개색’이 아니라 일본어의 ‘하늘색(소라이로)’이 잘못 정착된 말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소라색을 ‘하늘색’으로 순화하여 사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과거 피부색을 뜻하며 쓰였던 ‘기색(肌色)’ 또한 일본어 ‘하다이로(はだいろ, 살색)’를 한자로 직역한 표현이다. 특정 인종의 피부색을 기준처럼 제시한다는 비판에 따라, 현재는 국가기술표준원에 의해 ‘살구색’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재료가 곧 이름이 된 경우: 대자색, 번루색
어떤 색의 이름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 색을 내는 재료 자체에서 유래했다. 대자색(代赭色)은 붉은 흙에서 얻은 산화철 안료인 ‘대자’에서 비롯되었다. 전통 회화와 단청에서 흔히 쓰인 이 이름은, 색깔 그 자체를 지칭하는 형용사라기보다 안료라는 물질의 명칭이 색명으로 정착된 사례다. 번루색(蕃縷色)은 식물 ‘번루(별꽃)’에서 유래했다. 별꽃의 줄기와 잎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푸른 계열을 뜻한다. 이 역시 동양의 전통 색채 체계에서 식물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을 이름으로 빌려온 경우다.
기술과 안료의 언어: 인디고, 세피아
서구에서 들어온 외래 색명들은 대개 디자인 업계나 입시 미술계에서만 흔히 알려진 경우가 많다. ‘인디고’와 ‘세피아’ 또한 미대 입시생이라면 마땅히 알 정도로 중요한 색상이지만, 미술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인디고나 세피아가 색상명이라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도 있다. 이 두 색상은, 염료의 기원이나 제작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디고(Indigo)의 어원은 ‘인도에서 온 물감’이라는 뜻의 라틴어 ‘인디쿰(Indicum)’에서 출발했다. 이는 색의 느낌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그 색을 내는 천연염료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하는 지리적 언어다. 세피아(Sepia)는 ‘갑오징어’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실제 갑오징어 먹물에서 추출한 안료로 그림을 그리던 전통이 오늘날까지 색의 이름으로 남은 것이다. 이처럼 서구식 색명은 감각보다는 ‘재료와 기술’에 근거를 두는 경우가 많다.
이름의 역사를 아는 일
우리가 쓰는 색상의 이름을 다시 톺아보는 까닭은, 단순히 어떠한 표현을 ‘틀렸다’고 단정하거나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뱉는 이름이 식민지기의 잔재인지, 번역된 말인지, 혹은 재료의 이름인지 명확히 인식하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색을 부르는 말은 시대와 관습에 따라 달라진다. 어려운 색깔 이름을 톺아보는 일은,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어온 언어를 다시 바라보는 작업이다. 말의 출처를 아는 순간, 우리가 보는 색은 단순한 시각 정보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층위를 가진 깊이 있는 개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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