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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말가꿈이

우리말의 역사와 함께 한 건재 정인승의 생애, 기념관에서 엿보다

by 한글문화연대 2015. 4. 30.

우리말의 역사와 함께 한 건재 정인승의 생애, 기념관에서 엿보다

 

하수정(우리말 가꿈이6기, hsj7427@naver.com)

 

 

전라북도의 작은 시골 양악마을. 양악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토옥동 계곡의 맑은 물은 사람의 발길이 그리웠다고 말하듯 고요하고 한적하게 흐르고 있었다. 계곡을 지나 마을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하늘만큼이나 푸른 인삼 밭이 펼쳐져 있었다. 인삼밭으로 둘러싸여 굴곡진 언덕 위로 눈을 돌리니 작지도 크지도 않은 크기에 견고한 자태로 위엄을 보여주는 건재 정인승 기념관이 그곳에 있었다.

 

"말과 글을 잃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건재 정인승 선생이 남긴 말이다. 그는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본관은 동래 호는 건재이다.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우리 고유문화를 지키는 방안으로 한글을 연구한 국어 학자였던 그의 노력을 기리기 위해 2005년에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사진 속 곧은 모습의 정인승 선생이 보였다. 그러나 사진 속 정인승 선생의 얼굴에는 그 시절의 아픔도 담겨 있었다.

 

세종대왕의 한글 편찬 이후에 탄압이 있으리라고 그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을까. 1936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은 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나라의 문화를 잔인하리만큼 위협하였다. 그리고 문화 탄압의 대상 제 1순위는 바로 우리말이었다. 당시 일제는 우리말로 이야기하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말살하였다. 일제의 한글 탄압이라는 아픈 역사가 기념관을 따라 줄줄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전시실을 관람하던 중 잔인한 아픔이 느껴져 발걸음을 떼기 힘든 순간이 왔었다.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을 묘사한 전시글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창설된 한국 최초 민간 학술 단체이다. 정인승 선생 역시 조선어학회의 회원이었다. 그런데 1942년 10월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가와 같은 항일단체라고 지목하며 조선어학회 회원과 관련인물들을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검거하기 시작했다. 검거 당시 많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형무소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당시 정인승 선생은 함흥형무소로 끌려가 왼쪽 귀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받았으며 3년간의 옥고생활 까지 겪게 되었다.

 

전시관의 끝자락에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은 정인승 선생의 정신이 담긴 결과물들이 보란 듯이 전시 되어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는 형무소에서 풀려나자마자 다시 조용히 한글 연구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는 1947년 큰 사전 1권을 편찬했다. 이후 미국 록펠러 재단의 원조물자로 2,3권의 인쇄와 4권의 조판을 끝냈고 6.25사변의 어렵던 시간을 보낸 후 밤잠을 자지 않고 사전 5,6권의 수정을 마쳤다. 21년간의 각고 끝에 1967년 한글 큰 사전 6권 완질을 펴낸 것이다. 큰 사전은 현재 우리 사전의 밑거름이 될 만큼 체계적이었다.

 

1986년 7월 7일 ,애국으로 일생을 보냈던 그는 생애를 마감했다. 마치 기념관을 따라 그의 일생과 우리나라 역사의 굴곡이 기승전결로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기념관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겨레를 지키려했던 그의 정신이 여전히 녹아있었다.

 

정인승기념관에는 글로는 다 담아내기 힘들만큼 다양한 유형의 전시물이 존재하고 있으니 독자들에게 감히 직접 정인승 기념관에 방문하여 그의 흔적과 정신을 공유하기를 권유한다. 또한 저서 ‘자아를 위한 모색’은 우리 겨레와 얼에 대한 정인승 선생의 애국정신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

 

[정인승 기념관]

- 위치: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43번지
- 문의:063-352-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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