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병기, 글 읽기를 방해한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교육부에서 2018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방침을 검토 중이란다. 중학교부터 한문 수업에서 한자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한자 병기는 불필요하거니와 글 읽기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반대한다. 한글 전용 교과서로 공부해도 학생들이 문장 뜻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음은 신문·인터넷에 한자가 적혀 있지 않아도 뜻을 파악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것과 이치가 같다. 설명을 듣거나 읽고서 알게 된 낱말의 뜻은 그 낱말을 사용하면서 속성과 쓰임새를 더 풍부하게 알아가기 마련이다. 굳이 한자를 병기할 까닭이 없다.
25년 전 증권회사에 취직한 친구에게서 선물 거래를 맡고 있다고 들었다. 경제 지식이 넓지 않았던지라 그 친구에게 남을 기쁘게 하려고 주는 선물을 증권회사에서도 취급하느냐는 멍청한 질문을 던졌다. 친구는 그런 선물이 아니라 '미래 특정한 때에 현품을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매매 계약을 맺는 거래 종목'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일본에서 만든 이 경제 용어는 한자로 '앞설 선(先)'에 '물건 물(物)' 자를 쓴다. 한자 조합만으로는 '앞선 물건'이라는 부정확하고 부족한 뜻이지만 그나마도 한번 알고 나니까 거기에 한자를 병기해놓으면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선물 거래'나 '선물 시장' 같은 경제 용어에 한자가 병기돼 있지 않아도 우리는 문장 흐름에서 이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 초등 교과서에 나오는 파충류(爬蟲類) 역시 '벌레'가 아니므로 부정확한 한자 조합인 데다가 '기어다닐 파(爬)'는 여간해선 쓰지 않는 글자라 병기해 놓아도 뜻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글자를 모른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글 읽기를 멈춘다.
이렇듯 한자 병기는 문장 군데군데에 함정을 파놓는 짓이다. '부모' '학교'처럼 이미 잘 아는 단어 옆에 한자를 적어 놓는다면 그걸 읽어야 할 까닭이 없으므로 글 읽기 흐름을 끊는 함정이고, 어려운 한자는 모르니 그것대로 함정일 뿐이다.
한자어는 일종의 압축 번역어이므로 한자 지식은 낯선 한자어의 압축을 풀어주는 노릇을 한다. 이는 중·고교 한문 과목에서 제대로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자 지식이 더 많이 필요한 분야에서 일할 사람은 더 공부하면 된다. 초등학생에게 필요한 건 그 낱말의 다양한 성질에 대한 폭넓은 감수성이고 다양한 쓰임새를 보며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그 낱말을 부릴 줄 아는 능력이다.
# 이 글은 2015년 5월 19일 조선일보에 실린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의 글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5/18/20150518034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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