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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아리아리

한글 아리아리 448

by 한글문화연대 2013. 10. 31.

한글문화연대 소식지 448
2013년 10월 31일
발행인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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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바른 높임말] 사람을 제대로 높일 때 나도 존중받습니다.

■ 일터에서 1.사장님실

직장 상사는 ‘웃어른’이 아니라 ‘윗사람’이다. 회사에는 직급으로 볼 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존재한다. 가끔 윗사람을 높이려는 충정에서 사장님의 방을 ‘사장님실’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존대법에 어긋난 말이다. 높임의 뜻을 나타내는 ‘-님’은 ‘홍길동님’, ‘사장님’처럼 이름이나 직함 뒤에 붙어서 상대를 존대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장님실’이라고 하면 사장님의 방을 가리키는 말에 불필요하게 ‘님’을 붙인 경우로 올바른 존대법이라고 할 수 없다. 이때에는 직함 뒤에 곧바로 ‘-실’을 붙여 ‘사장실’로 말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요즘 손님을 대하는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의 말투를 들어보면 잘못된 높임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높임말은 사람을 존중하는 우리말의 아름다운 표현법입니다.
올바른 높임말 사용을 위해 한글문화연대가 만든 책자 "틀리기 쉬운 높임말 33가지"는
이곳에서 내려받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말 이야기] 걸고 끼고 쓰고 차는 것들_성기지 학술위원

우리 몸을 치장하는 액세서리를 한자말로는 장식물이라 하고 순 우리말로는 치렛거리라고 한다. 우리 몸의 일부에 착용하는 치렛거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목걸이와 귀고리, 팔찌, 시계, 반지와 같은 것들이다. 얼굴에 달거나 목에 끼우는 것은 ‘걸다’라고 하기 때문에, 귀에 다는 귀고리라든지 목에 끼우는 목걸이는 모두 ‘귀고리를 걸다’, ‘목걸이를 걸다’처럼 ‘걸다’로 쓰는 것이 알맞은 표현이다. 흔히 “예쁜 목걸이를 한 사람” 또는 “금목걸이를 찬 사람” 이렇게 ‘목걸이를 하다’, ‘목걸이를 차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목걸이를 걸다’가 바른 표현이다.

목걸이와는 달리, 귀고리의 경우에는 ‘귀고리를 걸다’와 ‘귀고리를 끼다’가 모두 맞다. 귀에 구멍을 뚫어서 그 구멍에 고리를 끼우기도 하기 때문에 ‘귀고리를 끼다’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추운 겨울에 귀가 시리지 않도록 걸었던 귀마개를 귀걸이라 하고 귀에 다는 치렛거리는 귀고리라 해서 구분했었는데, 현대에 와서 ‘귀걸이’도 ‘귀고리’와 함께 복수 표준어가 된 것이다.

“목걸이를 찬다.”고 말하다 보면, “넥타이를 찼다.”고 말하기 십상이다. ‘차다’는 말은 몸의 일부에 둘러매서 지니고 다니는 것일 때 쓰는데, 가령 ‘시계를 차다’, ‘완장을 차다’ 들과 같은 경우에 사용한다. 무엇인가를 몸에 걸어서 지니고 다닐 때에도 ‘차다’는 말을 쓰기 때문에, “수건을 허리춤에 찼다.”라든지, “권총을 찬 경찰” 들과 같이 쓸 수 있다. 그러나 넥타이는 찬다고 하지 않고 맨다고 한다. “넥타이를 맸다.”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다만, 시계와 비슷하게 착용하는 팔찌의 경우에는 ‘팔찌를 차다’와 ‘팔찌를 끼다’가 모두 맞다고 할 수 있다. 팔찌는 팔목에 끼우기도 하고 두르기도 하는 다양한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경을 끼다’와 ‘안경을 쓰다’도 자주 혼동되는 말이다. 이 경우에는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말 동사들은 제각기 자기 본연의 임무가 있어서, 그 임무에 맞게 사용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낱말이 가진 본래의 임무를 찾아 주면, 안경은 ‘끼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쓰는 것’이라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끼다’라고 하면 우리 몸의 일부에 꿰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다’, ‘장갑을 끼다’ 들처럼 사용한다. 이에 비해 ‘쓰다’는 우리 몸에 무엇인가를 얹어 놓거나 덮거나 또는 걸쳐 놓는 것을 이르는 동사이다. ‘모자를 쓰다’, ‘우산을 쓰다’, ‘탈을 쓰다’ 들처럼 사용한다. 안경도 얼굴에 꿰는 것이라기보다는 걸쳐 놓는 것이라고 하는 게 알맞기 때문에, “안경을 낀 사람”보다는 “안경을 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 [우리나라 좋은 나라] 나는 일요일에 분단에 간다._김영명 공동대표

나는 일요일에 분당에 간다. 그곳에 어머니가 계신다. 요양원이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신 지는 2년이 넘어 3년이 되어 간다. 어느 날 부모님과 가장 가까이 살면서 자주 챙겨주던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넘어져서 못 일어나셔서 병원으로 옮겼어.” 그때 이후 어머니는 집으로 못 돌아가셨다. 한 해쯤 지나서 그 집은 팔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 전부터 조금 이상한 행동을 하시기 시작했다. 내가 가면 옛날 사진들을 꺼내어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고, 옷을 몸에 맞춘다고 기장을 잘라 못 입게 만들고, 베란다에서 키우던 동백꽃 꽃잎을 하나하나 따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상한 짓을 한다고 어머니를 나무라기만 하셨고, 자식들도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는 못하였으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치매의 시작이었다.

그 전부터 파킨슨병을 조금 앓아 거동이 불편했고, 그 불편이 조금씩 심해져서 지팡이를 짚다가 보행 보조기를 사용하다가, 드디어는 앉은뱅이가 되고 마셨다. 그래서 댁에 계시면서 방문 요양사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몇 달을 그러시다가 마침내 집 안에서 넘어져서 못 일어나신 것이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시니 아버지 혼자 집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하고 그저 책만 아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어머니 없이 혼자 남게 되었으니 그 스트레스가 오죽했으랴. 그런 줄 알면서도 선뜻 모시겠다고 나서지 못한 사정을 독자 여러분들도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날마다 어머니 요양원에 가서 시간을 보내시고, 나는 주말마다 가서 함께 있다 아버지께 저녁을 사드리고 집에 모셔다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몸이 좀 안 좋다고 하시면서 한 사흘 입원하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해 드렸다. 그러나 그 다음다음 날 아침에 아버지는 깨어나지 못하셨다. 뇌출혈이었던 모양이다. 전날에 형에게 무척 화를 내었다고 한다. 그때 뇌 핏줄이 많이 터진 모양이나, 당신이 몸의 이상을 느꼈을 때 이미 출혈은 시작되었으리라고 한다. 의사 말이다.

아버지가 못 일어나시니, 담당 의사는 뇌에서 피를 빼내는 시술을 하지 않으면 당일 돌아가시고, 시술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나 결국 돌아가실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천하의 불효자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시술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뇌의 피를 빼내고 아버지는 한 달 반을 의식 불명 상태로 누워계시다가 숨을 거두셨다. 그 동안은 당신에게도 자식들에게도 고통이었다. 아니, 자식들이야 무슨 큰 고통이었겠느냐마는 당신이 고통을 안 느끼셨으면 좋겠다.

할아버지도 천수를 누리다 갑자기 쓰러져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도 비슷하게 되니, 의사는 가족력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네” 하면서도 “그런 가족력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냥 콱 죽을 수 있으니”라고 생각했다. 단 피를 빼 내는 그런 시술은 안 하는 것이 좋겠다. 결국 살아나지 못할 것을, 고통만 연장할 뿐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불필요한 의료 처치를 안 하도록 유언을 단단히 남길 생각이다. 내가 정신없을 때 그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당신에게도 다행한 일인 것도 같다. 계속 그렇게 몇 년이고 사셨더라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자식들이 무슨 다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나...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것에 대해 자식들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찜찜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대가족의 삶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들이 떨어져 살던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모두에게 고통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병들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모시는 것은 전문 훈련을 받은 요양사들이 더 잘 한다. 자식들은 그저 마음뿐이다.

노무현 정부가 노인 복지를 늘려서 요양비의 많은 부분을 정부에서 대준다. 이렇게 잘 해주는 데도 노인들은 노무현을 싫어하니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중산층이라면 요양비가 크게 부담되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이상한 행동도 하고 누워서 뱅뱅 돌고 하시더니 약을 계속 드시니 그런 것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정신이 점점 가물가물해진다. 원래 재미있는 분이라 요양사들이 그 재미있는 말들을 내게 옮기면서 웃고는 하였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점점 없어진다. 이제는 나를 알아보기도 하고 못 알아보기도 한다. 잘 못 알아보는데 아는 척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이름은 잊은 지 오래이고, 당신 이름과 당신 어머니, 즉 내 외할머니 이름은 아직도 외운다.

말이 점점 없어지고 기력도 점점 없어진다. 활활 타던 모닥불이 꺼지고 남은 재의 불씨가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다. 재를 휘휘 저으면 불씨가 조금 살아나기도 한다. 그러나 불씨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사인가? 짐승이 죽을 때가 되어 동굴에 들어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 어머니도 이런 상태에서 곡기를 끊게 되면 돌아가신다고 한다. 아직은 그래도 잘 드신다.

나는 외워서 하는 농담을 아래로 보는데(농담은 외워서 하는 게 아니다. 재치와 타이밍으로 하는 것이다), 그 중에 마음에 와 닿는 게 있다. 남녀의 차이에 대한 것인데, 다른 것은 다 잊었고, 80대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어진다, 뭐 이런 것이다. 지금의 어머니에게 꼭 맞는 것이 있다. “90대는 생사의 구분이 없다.” 어머니는 살아계시나 온전한 삶은 아니다. 뇌세포가 점점 없어져서 인지 능력뿐 아니라 감정도 없어진다. 아들이 와서 좋으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정말 좋은 것인지 기계적인 반응인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감정이 없는 것이 더 좋겠다. 슬픈 감정을 느끼시지 못하게...

내가 요양원에 가도 할 일이 없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얘기도 했지만, 이제 대화도 잘 안 된다. 여동생은 그래도 부산스럽게 말도 시키고 노래도 시키고 짝짜꿍도 시키는 모양이다. 왔다가는 것도 금방 잊어먹을테니, 사실 가나 안 가나 어머니에게는 똑 같을지도 모른다. 휠체어에 태우고 복도를 몇 바퀴 도는 것이 그나마 “할 일”이다. 이러니 내가 방문하는 것이 어머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번 주 일요일에도 나는 분당에 간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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