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말이 그렇구나-346] 성기지 운영위원



어릴 때 어머니 심부름 가운데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이 외상으로 물건 사오기였다. 그렇잖아도 숫기가 없었던 터라 돈도 없이 물건을 사온다는 건 엄청난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대단한 용기를 내야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신용카드 한 장으로 얼마가 됐든(그래도 5만 원 넘는 외상엔 간이 졸아들지만) 어디서든 외상을 떳떳이 한다. 달라진 시대는 두께가 1밀리미터 남짓한 플라스틱 안에 모든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순 우리말에 ‘외상없다’라는 말이 있다. “조금도 틀림이 없거나 어김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토박이말이다. 가령, “그 사람은 참 성실해서 무슨 일이든지 외상없이 해놓곤 한다.”라고 쓸 수 있다. 신용카드는 비록 30일 안에 물건값을 치르면 되도록 외상을 주고 있지만, 그 약속을 어기면 잔인한(?) 대가가 따른다. 외상없이 외상을 해야 계속 쓸 수 있는 신용 장부인 셈이다.


외상과 관련하여 살려 쓸 만한 토박이말 가운데 ‘외상말코지’가 있다. 이 말은 어떤 일을 시키거나 물건을 맞출 때, 돈을 먼저 치르지 않으면 얼른 해 주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요즘 서울 어느 재개발 조합이 수천 세대의 아파트 분양을 앞두고 있는데, 분양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미 터 닦기 공사를 하고 있던 시공사는 분양대금이 들어올 때까지 외상말코지를 하고 있다. 분양가 협상이 잘 되어 외상없이 공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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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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