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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사악과 야만

by 한글문화연대 2014. 6. 5.

[우리 나라 좋은 나라-35] 김영명 공동대표

 

2014년 5월 29일 <한국일보> 18쪽에 흥미로운 기사 두 개가 실렸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흥미롭지 않겠지만, 나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흥미롭지 않은 기사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기사 두 개였다.


제목이 각각 “‘더 이상 총질은 안 돼’ 미 울린 아버지의 절규”와 “대낮 법원 앞에서... 파키스탄 임산부의 비극”이었다. 둘 다 사람 죽은 이야기다. 먼저 것은 미국에서 심심하면 일어나는 묻지 마 총질에 관한 기사이고, 뒤의 것은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가족 남자들이 신부를 죽인 기사다.


어느 것이 더 끔찍한가? 물론 뒤의 것이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앞의 것은 여자들이 자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아무 상관 없는 6명을 죽인 무차별 살인이고, 뒤의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뚜렷한 명분을 가지고 1명을 죽인 사건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외계인이나 아니면 500년 뒤의 지구 사람들이 요새 지구 사람들의 행동 중 가장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흡연(만약 그들이 담배를 안 피운다면)과 미국에서 총기를 규제하지 못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왔다. 


미국 사람 아닌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미국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까닭은 있고 그것을 이해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총기 산업의 로비가 워낙 거세다 보니 총기 규제법을 제대로 못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총기 사고가 빈발하는 데도 여전히 미국 보수파들은 끄떡도 안 하니 그것이 이해 불가인 것이다. 뭐 실은 이해 불가도 아니다. 다 돈 때문이지. 역시 미국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다. 한국도 돈이 지배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민간인이 살상용 총기를 가질 수 없는 환경이 다행일 뿐이다.


우스운 것은 그러면서 미국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민주 시민이라서, 자유를 만끽해서 총기를 규제 안 한다고 여기는 일이다. 총기 소유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한다나 어쩐다나... 한심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를 사악한 위선이라 본다. 최첨단 문명국인 미국에서 일어나는 야만이자 사악함이다.


파키스탄 뿐 아니라 이슬람 사회에서는 이른바 명예 살인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남자도 명예 살인을 당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언론 보도에서는 본 적이 없다. 여자가 주로 바람을 피웠다든지 이교도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든지 하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에게 돌이나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 사회에서도 아마 다수의 행태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자기 문화의 일부라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문화 상대주의이다. 그러나 다른 문화를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문화를 다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편적 가치가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기준이 모호하기는 하나, 적어도 자기 딸을 때려죽이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명예 살인은 야만적이다. 야만적이고 미개하다. 첨단 문명임을 자랑하는 미국의 세련된 총질은 결코 미개하지는 않으나 사악하다. 미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명예살인보다 덜 끔찍하다고 받아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깔끔하게 차려입고 세련된 미소로 단추 하나 눌러 수 만 명을 죽이는 일과 피투성이 도끼질로 수십 명을 죽이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큰 악인가? 피투성이의 끔찍한 모습에 현혹되어 그것이 더 끔찍하다고만 느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의 총기 난사보다 파키스탄의 명예 살인에 더 혐오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른 바 선진국과 후진국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문화적 편견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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