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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그들만의 언어, '보그체' - 권나현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22. 6. 24.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9기 권나현 기자
nahyunia@naver.com

 

여름옷을 장만하기 위해 누리집을 둘러보던 중, 이러한 문구를 발견했다. ‘이번 썸머 시즌 어반 컨템포러리 보헤미안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 외국어 범벅인 이 문장을 머릿속으로 두어 번 곱씹고 나서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의류 매장이나 누리집을 둘러보면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상품명이나 제품 설명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외국어가 가득하다.

이러한 문체를 ‘보그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을 빚어낸 외국 잡지사 ‘보그(VOGUE)’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보그체’란 의류업계에서 주로 쓰는 문체를 일컫는 용어로, 문장에 쓰는 단어 대부분을 영어나 외국어로 대체하고 조사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색깔을 영어로 표기하는 것은 기본이다. 블랙, 레드, 화이트부터 오트밀, 크림슨, 차콜까지. ‘분위기’, ‘느낌’이라는 쉬운 우리말이 있음에도 ‘무드(mood)’로 바꾸어버렸다. 서술어도 예외는 아니다. ‘입다’는 ‘웨어하다’, ‘추천하다‘는 ‘레코멘트하다’라고 써놓으니, 참 괴상하다. 의류업계 유행어인 ‘엣지 있는’,‘머스트 해브 아이템’도 이 현상의 일종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글고운>, 무신사 누리집

아무리 의류업계 용어가 영어, 프랑스어 위주라지만 외국어 사용이 지나치다. 불필요한 외국어를 문장에 억지로 집어넣으니 어감이 부자연스럽고 가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체가 대중을 상대로 쓰이기 시작하니 이질적이다 못해 ‘보그체’라는 표현까지 낳게 된 것이다. 사실 한국어로 대부분 대체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어로 순화하니 더 이해하기 쉽고 편하기까지 하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의류업계에서만 두드러진 것이 아니다. 아래의 사진은 각각 화장품 광고, 맥줏집 차림표다. ‘보그체’가 의류업계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 출처 – 올리브영 누리집, 네이버 블로그 <따이몽>

그렇다면 ‘보그체’는 왜 사용하는 것일까. 영어나 프랑스어 등 외국어가 한국어보다 고급스럽고 세련됐다는 인식 때문이다. 사실 어떤 분야든 그들 사이에서만 쓰이는 표현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 의류산업의 흐름은 주로 외국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어떤 용어들은 한국어로 바꿔쓸 수 없거나, 의미를 대체할 다른 단어를 찾기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 소위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외국어를 의도적으로 첨가해 만든 것이 ‘보그체’다. 단어의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그저 겉치레로만 사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보그체’를 사용함으로써 외국어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고 지적 허영심을 충족한다. 그래서 ‘보그체’는 한국어를 파괴하는 원인으로 손꼽힌다. 외국어를 과하게 쓰도록 이끌고, 한국어를 낮잡아 보는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보그체’ 문장은 어법이 바르지 않다. “머스큘러하고 텐션이 있는 바디라인을 살려주는 퍼펙트한 쉐입”이라는 문장을 보자. 수식어가 길게 나열되어 있어 의미를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수식어를 줄줄이 덧붙이는 것도 ‘보그체’의 특징 중 하나다. 능동형 문장을 굳이 수동형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잘못된 문장구조에 익숙해진다. ‘바디’, ‘쉐입’ 등 외국어 표기법에 맞지 않는 단어들도 난무하다. 바른 표기는 ‘보디’, ‘셰이프’이다.

‘보그체’는 의사소통 과정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상품설명을 읽어보거나 의류업계 종사자에게 설명을 듣다 보면 알 수 없는 용어들로 머릿속이 알쏭달쏭하다. 마치 다른 세상 속 그들만의 언어를 듣는 듯하다. 게다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영어 단어가 아닌 영어사전에서나 볼 법한 생소한 단어를 골라 사용하는데, 소비자가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해석하더라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 된다. ‘보그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왠지 최신 유행에 뒤처지는 듯한 불안감을 주기까지 한다. 따라서 소비자 이익을 위해서라도 ‘보그체’를 쉬운 한국어로 순화해야 한다. 물론 이는 의류업계뿐 아니라 ‘보그체’를 선호하는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된 문장을 한국어로 순화해보자. ‘이번 썸머 시즌 어반 컨템포러리 보헤미안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 이를 ‘자유분방한 도시인을 위한 이번 여름 필수품’으로 순화하니 훨씬 자연스럽다. 불필요한 외국어를 남발하는 ‘보그체’를 우리말 표현으로 순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이트 웨어’는 ‘잠옷’, ‘스포티(sporty)한’은 ‘활동적인’, ‘아더 컬러’는 ‘다른 색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소비자는 ‘보그체’에 익숙해지지 말고, 의류업계가 쉬운 우리말을 애용하는 날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의류업계 종사자는 더더욱 눈여겨보고 고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들만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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