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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언론에 나온 우리

[경향신문] 외국어 '상용', 되풀이되는 악몽 - 2022.08.30

by 한글문화연대 2022. 8. 30.

2030년 부산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한다니 반갑고, 박람회를 계기로 ‘글로벌 허브 도시’를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도 희망적이다. 하지만 다이내믹 부산을 필두로 BIFF(부산국제영화제), 마린시티, 그린시티, 에코델타시티, 센텀시티, 문텐로드(달맞이길), 휴먼브릿지 등 영어 남용으로 ‘글로벌 허브 도시’가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랄까, 최근 박형준 시장은 부산을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영어 상용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영어국제학교 설립, 외국전문대학 유치, 영어교육센터 조성 등의 방안을 내놓았다. 외국인은 환영할지 모르지만,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상용해야 하는, 즉 일상적으로 써야 하는 처지에 놓인 부산 시민에게는 어떤 이득이 있을까?

한국에는 외국어 상용을 강요당한 아픈 역사가 있다. 1936년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는 내선일체를 구호로 강력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신사참배, 창씨개명, 궁성요배 등만 아니라 국어 상용을 강요했다. 당시 국어는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였다.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말하게 한다는 완벽한 동화의 실현을 목표로, 1942년 5월 국어전해운동과 국어상용운동을 본격화하면서 학교나 직장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쓰도록 했다. 위반하면 벌금도 물게 했다.

1942년 6월, 국민총력연맹은 일본어 학습을 애국반 실천사항 중 하나로 정했고, 전국에 수천 개의 일본어 강습소를 설치했으며 은행, 우체국, 학교, 대형 상점 등에서 일본어 상용이 의무화되었다. 조선인들은 야학과 애국반상회에서 일본어를 공부했고, 학교 다니는 자녀에게도 배웠다. 함경북도 종성군에서는 1942년 10월부터 1943년 3월까지 매일 저녁 7~9시 사이에 일본어 강좌를 열어, 주민들을 동원했다.

영어 상용도시 계획에는 공공기관 영어 학습 지원 강화, 부산시청 뉴스 영어 브리핑 실시, 공문서와 안내판 영어 병용 등의 내용이 담겼다. 영어 학습 지원이나 안내판 영어 표기 정도는 필요할 수 있겠지만, 부산시청에서 뉴스를 영어로 하거나, 공문서를 영어로 작성할 이유는 없다. 영어 상용 강요는 공직자·학생·시민에게 영어 학습 부담을 지우고, 언어생활뿐 아니라 평온한 일상에도 혼란과 불편을 야기할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국어 상용’과 부산시의 ‘영어 상용’은 추진 주체와 대상어, 목적의 취지 등에서는 다르지만, 외국어 상용 강요라는 점에서는 같다. ‘국어 상용’은 동화의 실현이라는 식민지배의 완성을 기도한 것이었고, 영어 상용은 세계박람회의 성공과 외국인도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영어 소통이 가능한 국제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인데, 자칫 부산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시민을 영어의 질곡에 빠뜨릴 수 있다. 무분별한 정책으로 ‘상용’의 악몽을 되풀이하게 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의 영어 인재를 길러 앞날을 대비하자.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ntribution/article/202208300300025

본 기사는 경향신문(2022.08.30)에 기고한 글입니다.

 

[기고] 외국어 ‘상용’, 되풀이되는 악몽

2030년 부산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한다니 반갑고, 박람회를 계기로 ‘글로벌 허브 도시’를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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