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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말 비빔밥(이건범)

부산 영어 상용의 운명은?

by 한글문화연대 2022. 8. 31.

‘상용’이란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부산을 영어상용도시로 만들겠다고 하니, 부산 시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상태가 된다는 이야기다. 2030년 세계박람회를 유치해 그때 부산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목표인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영어교육 강화다. 그런데 지금까지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던 것도 아니므로 영어교육을 아무리 강화한다고 해도 그리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생들은 영어만 공부해도 되는 형편이 아니고, 어른들은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다른 지자체에서 영어마을 여기저기 만들었다가 모두 실패했으니, 영어마을 몇 개 지어봤자 이 또한 예산 낭비에 효과는 못 거둘 위험이 크다.


그럼 그다음은? ‘영어의 바다’에 빠뜨리는 식의 강제적 영어 환경 조성이다. 목숨을 건 ‘생존 영어’야말로 문법, 품위, 격조 이런 거추장스러운 치장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의사소통’을 향한 필사적인 언어 습득 방법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런 환경이면 공부를 조금만 해도 쏙쏙 머리에 들어가지 않을까? 시민 개인이야 영어 몰입 환경을 만들고 싶어도 그럴 처지가 못 되니, 당연히 공권력이 이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

모든 안내판을 영어로 적고, 교통수단이나 공공시설의 안내 방송을 영어로 내보내야 한다. 부산시에서 추진하는 주요 정책도 영어로 설명하고 소개하며, 민원서류도 영어로 작성할 수 있게 지원하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이미 박 시장은 이런 공공이 주도하는 영어 상용 전략을 제시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말과 한글로 된 정보를 함께 주면 당연히 영어보다는 국어 쪽으로 눈을 돌릴 테니, 그래선 안 된다. 부산시에서 일부 공문서만 영어판을 함께 내는 것이지 국어기본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공문서에 영어를 섞어 쓸 방침은 아니라고 하던데, 이래서는 아무 소용 없다.

공무원들이 공문서에 잔뜩 영어를 넣다 보면 무슨 말인지 몰라서 답답해하는 시민들은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금 고지서가 영어로 날아오고, 지역 개발 정보도 영어로 제공되고, 전기·수도·가스 공급 관련된 특이 사항도 영어로 안내되고, 복지제도 이용하려면 영어로 신청서 작성해야 하는데 영어 공부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있겠는가?

당연히 공무원들의 영어 능력도 획기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영어 능력이 뛰어난 공무원들을 대거 특채하고 우대해야 하며, 인사 고과에 직무 능력보다는 영어 능력을 대폭 반영해 영어 공부를 독려해야 한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공무원들에게는 교육비는 물론 업무 시간 일부도 영어 공부에 쓸 수 있게 배려해줘야 한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따라오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영어의 바다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영어 습득의 필요를 매우 강렬하게 느끼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 총독부가 조선을 강점하고 중일전쟁 뒤에 ‘조선의 국어’인 일본어를 상용하게 만들려고 했던 방법 가운데에는 벌금을 물리는 정책도 있었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거리에서건 조선어를 쓰다 걸리면 벌금을 물린 것이다. 사실 이 정도로 강제성을 띠어야 일본어 상용보다도 더 어려운 영어 상용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지 않을까?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는 그렇게 반복된다고 했던가. 일본어 상용의 비극이 오늘날 영어 상용이라는 희극으로 재현되고 있다. 세계박람회 성공보다 더 힘든 게 부산 영어상용도시 만들기일 텐데, 배보다 배꼽이 더 커 보인다.



이 글은 국민일보(청사초롱>란에도 연재하였습니다.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61547&code=11171362&cp=nv

 

[청사초롱] 부산 영어 상용의 운명은?

‘상용’이란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부산을 영어상용도시로 만들겠다고 하니, 부산 시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적으로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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