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9기 권나현 기자
‘IAEA, NPT, ETRI, IPEF….’ 보도자료나 공문서에는 국제기구, 공공기관 등의 명칭이 대부분 로마자 약칭으로 표기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의 로마자 약칭인 ‘APEC’을 비교해 보았을 때처럼, 로마자 약칭은 전문용어를 짧게 표기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별다른 설명 없이 로마자 약칭만 써둔다면, 각 알파벳이 뜻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아 이 로마자 약칭의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없다. 만약 이 단어가 국민이나 불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쓰인다면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발생할 뿐 아니라, 누군가에겐 차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로마자 약칭을 우리말 약칭으로 바꾸어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뜻하는 로마자 약칭 ‘FED’를 ‘미 연준’이라는 우리말 약칭으로 바꾸어 부르듯이 말이다.
한글문화연대는 이러한 로마자 줄임말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우리말 약칭으로 바꿀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12월 2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로마자 약칭 대응 방안: 우리말 약칭 만들기>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발표자를 비롯해 약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의 인사말로 학술대회가 시작되었다. 이건범 대표는 최근 이태원 참사 당시 언론 보도에 로마자 약칭 ‘CPR(심폐 소생술)’이 빈번하게 쓰여 심각성을 느꼈다고 언급하며, 로마자 약칭 문제의 해결 방안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말했다. 한글학회 권재일 이사장은 축사를 통해 “언어의 경제성과 아름다움, 품격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라며, 표현의 경제성보다 이해의 경제성을 추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번 학술대회의 발표는 6개 주제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로 이정복 대구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가 <줄임말 문화와 외래 고유명사의 줄임말>을 주제로 발표했다. 이정복 교수는 줄임말의 형성 원리와 외래 고유명사 줄임말의 사용 방식을 살펴보며, 로마자 줄임말이나 외래 고유명사를 처음 들여올 때부터 한국어 번역 줄임말을 함께 만들어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는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부대표가 <정부 보도자료의 로마자 사용 실태와 우리말 약칭 사용 제안>을 주제로 발표했다. 김명진 부대표는 한글문화연대가 중앙정부 행정기관과 광역지자체의 공문서와 보도자료를 조사해 국어기본법에 위반된 로마자 표기의 개선을 요구해왔다고 말했다. 또한, 공공기관에서 투명성이 낮고 모호성이 높은 로마자 약어를 사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으며, 우리말 약칭을 제정해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부나 언론 등 공신력 있는 단체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로 이경우 서울신문 어문부 전문기자는 <언론의 줄임말 문화: 로마자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한겨레,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 여러 언론사의 기사 작성 지침서에 명시된 외국어 표기 원칙을 조사해 발표했다. 이를 통해 한겨레, 경향신문이 비교적 한글 표기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언론사는 이미 굳어져 버린 관행을 개선하기 어려워하지만 여러 단체나 학회가 참여해 대안을 제시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
네 번째로 <중국의 ‘자모어’ 인식과 언론의 로마자 약어 사용 현황>에 대해 김석영 교원대학교 중국어교육과 교수가 발표했다. 중국 언론매체가 ‘자모어’를 표기하는 방식을 살펴본 결과, 중국 언론매체는 대중의 이해도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로마자 약어 표기보다 한자어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음으로 이은용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는 <보도자료에 사용된 로마자 약어에 대한 한일의 번역양상 비교 고찰>을 주제로 발표했다. 로마자 약어에 대한 한일번역을 비교하면서, 일본어 번역이 한국어보다 더 다양한 어휘나 외래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최형용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우리말 줄임의 실험적 제안>을 주제로, 로마자 약칭을 우리말 약칭으로 대체할 방안을 제안했다. 우선 기존의 줄임말이 만들어진 유형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보도자료에 쓰이는 여러 로마자 약어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발표가 끝난 후 토론이 진행되었다. 토론에는 세 명의 토론자와, 앞서 발표를 맡은 여섯 명의 발표자가 참여했다. 김주만 문화방송 기자, 이제훈 한겨레신문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토론자로 나서 각자의 질문을 던졌다. 김주만 문화방송 기자는 로마자 약칭 사용이 이미 굳어져 있어 개선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존재할 뿐 아니라, 경제성, 지면의 한계, 시간의 한계 때문에 로마자 약자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며 전문기관이나 단체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는 로마자 기반의 새로운 단어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는 만큼 모든 세대가 통용할 수 있는 조어법이나 규칙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로마자 약어를 우리말 약어로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앞으로 우리말 약칭을 만들어 갈 방식과 주체에 대해 제안했다.
토론이 끝난 후, 청중들의 간단한 소감을 끝으로 학술대회는 마무리되었다. 김미형 국어문화원연합회 회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우리말 약칭 제정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을 수 있어 보람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또, 로마자 약칭을 관대하게 쓰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움직임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나서영 한글문화연대 연구원은 “로마자 약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어를 알아도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게 공문서의 요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용감하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동안 공문서와 보도자료에서는 국제기구, 공공기관 등의 명칭을 대부분 로마자 약칭으로 표기해 왔다. 안타깝게도, 새로 들여온 로마자 약칭을 사용하기 전에 한글로 된 정식 명칭을 축약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단순히 로마자 사용을 반대하는 게 아닌, 로마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소외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이를 개선해야 한다. 이번 학술대회를 시작으로, 그동안 로마자 약칭을 관대하게 써오던 보도자료나 공문서에 실질적인 개선의 움직임이 나타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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