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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지하철역의 이름전쟁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순우리말 이름 - 서경아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16. 7. 14.

지하철역의 이름전쟁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순우리말 이름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3기 서경아 기자

calum0215@gmail.com
 

낯선 이름, 디지털미디어시티

 

렛츠런파크역 가든파이브역 남동인더스파크역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외국어도 한국어도 아닌 뜻 모를 이 낯선 이름들은 놀랍게도 서울수도권의 지하철 역이름으로 올랐거나 제정된 것들이다. 수도권 지하철 4호선 ‘경마공원역’은 한국마사회와 지자체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역 이름 교체방안에 따라 ‘렛츠런파크역’으로 바뀌게 될 상황이다. 마사회는 2014년에 이미 서울경마공원의 이름을 ‘렛츠런파크 서울’로 바꾸었으며, 시설의 이름이 바뀜에 따라 지하철 역명 또한 함께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한글 단체들의 반발이 잇따르고 있다. 공공시설물인 지하철역 이름을 영어로 지으면 영어를 모르는 시민을 배려하지 못한 꼴이란 지적이다.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은 “경마가 주는 사행성 이미지를 가리기 위해 공원 이름을 외래어로 바꾸더니 이젠 공공시설물인 지하철역에까지 영어 이름을 붙이려 한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모두모임은 사당역 이용객과 과천 시민을 대상으로 시민 2,564명이 참여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결과 설문에 응답한 시민 82%(2,093명)는 ‘경마공원역’의 이름을 ‘렛츠런파크역’으로 바꾸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사회 관계자에 따르면 렛츠런파크 서울은 이미 주말 젊은 층이 자녀를 데리고 문화를 즐기는 테마파크로 변신하였으며, 문화와 레저가 있는 테마성 공간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역명변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특정 기관의 재도약을 위해, 시민들이 이용하는 지하철역의 이름이 낯선 외래어로 바뀌어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한편 지하철 8호선 장지역은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가든파이브 상가의 상권 활성화를 바라는 상인들의 요구로 인해 ‘가든파이브’역으로의 개정요청이 있었지만, 영어 이름이라는 이유로 결정이 보류되었다. 이처럼 한글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명요청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으며, 우리말 역 이름은 점차 사라져 가는 상황이다. 개통 직전까지는 '남동공단역'으로 내정됐다가, '공단'이란 단어의 이미지가 나쁘다는 지역 여론에 밀려 외국어인 '인더스파크'로 변경된 ‘남동인더스파크역’과 수색역에서 개명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의 경우가 그런 사례이다.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외국어 작명 행렬의 끝엔, 우리말 번역본의 지하철 노선도가 필요해질 날이 오지는 않을까. 

 

신목동역, 구반포역, 삼성중앙역 그리고 압구정 로데오역

‘청수나루’역 이름에 반대하는 주민들

이곳들의 본래 역명은 용왕산역, 서릿개역, 학당골역, 청수나루역이다. 정감 어린 우리말 이름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 공통적인 배경엔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있다. 이들은 왜 우리말 역명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역 이름 개명에까지 나서게 되었던 걸까. 바뀐 역명에는 ‘목동, 반포, 삼성, 압구정’이라는 소위 ‘잘 나간다’고 불리는 지역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며 해당 지역과의 연관성이 뚜렷하고 지역 실정에 부합해야 한다.’는 역명제정 기준이 ‘집값’ 혹은 ‘지역 이미지’에 이용되고 있다.


옛 지명을 되살려 역 이름을 정하는 방식에 주민들이 불만을 가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서릿개는 반포의 우리말이자 ‘개울물이 굽이쳐 흐른다’는 뜻이었지만, 주위 아파트 주민 6,700여 명이 서릿개의 어감이 욕설로 보일 소지가 있고 남의 과일을 훔치는 ‘서리’를 떠올리게 한다며 역명 변경을 요구했다. 압구정로데오역의 본래 이름인 ‘청수나루’ 또한 강남과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어감이란 이유로 인근 상인들의 반발을 샀다. ‘우리말은 저속하고 촌스럽기에 외래어나 지역 효과를 볼 수 있는 단어를 넣어야 고급스럽다는 생각’은 우리말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원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말의 옛 지명이 사라져 간 이유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자어지명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순우리말 지명이 사라졌기 때문이지 우리말이 저속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잊혀온 세월만큼 사람들이 순우리말에 느끼는 낯선 거리감은 존재하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주입된 사상의 흔적을 지금까지 지닌 채 우리말의 가치를 낮게 매기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 생각일 뿐이다.

 

압구정로데오역 6번 출구

물론 지하철역 이름을 정하는 것은 언어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할 문제는 아니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그 이름을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될 주민들의 의견이 가장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잠실새내역’의 경우는 각각의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룬 좋은 사례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천역’은 실제론 신천동이 아닌 잠실동에 있거니와, 2호선의 신촌역과 발음이 비슷해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 잠실 지역 주민들이 ‘잠실새내역’으로 역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송파구는 주민을 대상으로 신잠실역, 잠실중앙역 등을 함께 놓고 선호도 조사를 하였고, 그 결과 ‘잠실새내역’이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역명으로 결정되었다. 대안으로 제시된 이름 가운데, 한자어 ‘신천(新川)’에 대응하는 순우리말 ‘새내’가 들어 있는 이름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는 것과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 인근 땅값과 상권 그리고 지역 이미지까지 제각각의 이유를 지닌 채 역명을 둘러싼 이름전쟁은 아직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그 다툼에 휘말려 우리 고유어가 가진 역사성과 가치가 등한시되어 사라진다면…. 다시금 우리말을 잃게 되는 역사가 반복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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