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좋은 나라-68] 김영명 공동대표
그런데 반미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용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미도 아니고 친미도 아닌 그야말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용미를 함으로써 한국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말이다. 이 말이 지닌 강점은 우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중용의 분위기를 지닌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감정이나 감상에 치우치지 않은 합리적 이성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여기에는 문제가 없을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한 마디로 용미란 미국을 이용한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이 점이 분명하지 않다.
먼저, 그것이 ‘미국의 논리를 수용하고 국제 행동에 동참하면 미국이 우리에게 여러 이익을 줄 것이니 미국을 그렇게 이용하자’라는 논리라면 친미와 다를 것이 별로 없다. 둘째, 그것이 ‘미국을 이용하여 러시아, 중국, 일본 등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자’라는 의미라면 현실성이 없는 말이다. 국제 사회의 역학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그럴 만한 현안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미국이 원하기 때문에’ 또는 ‘미국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이 무엇을 한다는 논리가 되면 미국의 논리를 수용하고 시작하자는 앞의 논리와 마찬가지가 된다. 셋째, 미국(정부나 국가)을 ‘반미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현실에서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식의 용미는 없다. 용미론은 미국을 이용하는 것이니 당연히 미국과 대립되는 상황도 상정해야 할 것인데, 과연 그런 것이 용미론에 있는지 모르겠다.
위에서 말했듯이 근본적으로 용미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거니와, 실제로 용미론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이런 사실은 열린 민족주의론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열린 민족주의가 민족주의의 폐쇄성을 지적한 뒤 ‘그러니까 폐쇄적이 아닌 열린 민족주의를 하자’라는 허망한 결론에 이르는 것처럼, 용미론 역시 ‘반미도 친미도 문제가 있으니 미국을 잘 이용하자’라는 알맹이 없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러다보니 용미라는 제목이 들어간 학술 논문이나 저서는 문헌정보 검색에서 나오지 않는다. 없다는 말이다. 그저 일상대화에서 얘기할 수 있는 주제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근본적으로 용미는 성향상 반미보다는 친미에 더 가깝다. 우선, 용미론자는 친미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감정보다는 이성을 강조한다. 또 용미는 친미와 마찬가지로 미국 논리와 미국의 힘을 수용할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용미는 친미와 다른 범주가 아니라 그 하위 범주의, 좀 더 온건한 형태의 친미라고 해도 좋아 보인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한계는 우리가 미국을 이용하기보다는 미국이 우리를, 또 우리의 용미론자들을 이용하기가 훨씬 더 쉬우리라는 점이다.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격차 때문이다.
구한말 개화파들이 일본 이용을 외쳤지만, 결국 일본에 이용당하고 말았던 현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고 수구파들을 몰아내고 대외 개방과 국내 개혁을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정국 창립 기념식을 기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이 청을 의식하여 적극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본이 지원하여 정변이 성공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조선이 청에게서 독립하고 문명 개화의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1884년 당시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정변을 적극 지원하지 않았던 일본은 그 10년 뒤에 결국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본격적인 조선 침탈을 시작하였다. 일본이 만약 1884년에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때 갑신정변은 성공했을 것이고, 일본의 조선 침탈도 그때, 곧 실제보다 10년 앞서서 본격화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개화파들을 이용하여 조선을 청의 지배에서 ‘독립’시키고 그 뒤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개화파들은 그들의 힘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화시키려고 하였지만, 과연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 상황이었을까?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서로를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그 방향이 대등할 수는 없다. 결국 그 이용은 강한 나라가 원하는 대로 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미 관계에서, 아니 한미 관계뿐 아니라 모든 국제관계 심지어 모든 인간 관계에서 이성적인 것은 감성적인 것보다 언제나 더 가치 있는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나라들 사이에서는 다른 인간 관계와는 달리 이성적인 판단이 감성적인 것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고, 또 그런 생각이 상당히 타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들 사이의 관계 역시 감성적인 가치가 중요할 경우도 존재한다. 심지어 감성보다 이성적인 판단이 더 중요할 것 같은 경우에서조차 감성적인 행동들이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 있고, 그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도 아니다. 합리적인 손익 계산을 초월하는 가치관이 존재할 수도 있고,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분출되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사람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국가 이익의 냉철한 계산을 통해서가 아니다. 특정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 민족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등등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인 이유로 얼마든지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것을 우리는 반드시 잘못된 전쟁 동기라고 폄하할 수 없다. (모든 전쟁을 부정하는 견해는 또 다른 차원이다.) 합리적인 동기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이런 감정적인 동기는 잘잘못을 떠나 그리고 그에 대한 긍정, 부정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존재하는 인간 행동의 일부분이다.
한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관계에서 감성적인 행동 동기에 대한 평가 역시 우선은 그런 감성적인 면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 감성적인 행동은 바람직한가 아닌가? 이에 대한 판단은 사람에 따라 그리고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 판단은 구체적으로 현상 유지를 원하느냐 아니면 그 변화를 원하느냐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앞서 효순이 예를 들었듯이 감성이나 감정이 선행하지 않으면 현실 도전의 행동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이는 사회 개혁이나 변화 또는 그 저지에 매우 중요한 추진력이다. 북한 피난민들의 북한에 대한 태도나 노년 보수층의 진보파에 대한 혐오감은 매우 감정적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보수층의 반감은 단순한 반감을 넘어 원한에 가까울 정도였다. 감정은 진보파 뿐 아니라 보수파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어느 쪽이 더 감성적이고 어느 쪽이 더 이성적인지를 그 자체로 판별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친미든 반미든 용미든 모두 감정과 이성, 감성과 계산이 혼합되어 있다.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또 어느 쪽이 더 크게 작용하는가는 개개인의 가치관이나 기질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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