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에 대하여 (7)
[우리 나라 좋은 나라-68] 김영명 공동대표
그런데 국가 이익에는 안보와 경제뿐인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이 많지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만 더 들려고 한다. 하나는 국가 주권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의 인권이다. 국가 주권은 국가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권리다. 명목상 현대 사회의 국가는 모두 주권을 누린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명목일 뿐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주권을 모든 나라들이 골고루 누리는 것은 아니다. 힘 센 나라는 더 누리고 약한 나라는 덜 누린다. 파나마의 실권자 노리에가는 마약 밀수 혐의로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1990년 미군이 직접 파나마를 침공하여 남의 나라 실권자를 체포해 갔다. 파나마가 과연 주권을 제대로 누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은 대량 살상 무기를 찾아 없앤다는 구실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고 이라크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대등한 주권국 사이에서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북한의 김정일은 핵무기 개발에 매달렸다. 이것이 대한민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북한으로서는 자신,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집권자 둘 다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고육지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경우는 어떤가? 대한민국은 국제 체제 안에서 주권을 어느 정도로 누리고 있을까? 물론 파나마나 이라크보다는 더 누리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강대국들에 비해 주권의 범위와 정도가 덜한 것도 사실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아직 힘이 약한 나라이기 때문이고, 더 직접적으로는 한미 동맹의 틀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간섭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이 판문점을 지키고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군이 가지고 있는 현실이 한국 주권의 실상이다. 더 일반적으로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미국의 세계 전략 구도를 벗어나는 정책을 취하지 못했다. 바로 그런 까닭 때문에 한국에는 진정한 외교 정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런 상황은 동맹의 하위 참여자로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생존 자체가 미국에 의존했던 역사를 볼 때 그렇다. 그러나 동맹 안에서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획득하여 한국의 국가 주권을 높일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면 반미 운동은 한국의 국가 주권을 올릴 수 있을 것인가? 반미 운동의 한 목적이 미국에 대한 한국의 주권 강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미 동맹 안에서 또는 더 일반적으로 세계 정치 무대에서 한국의 자주성을 더 높이는 데에 반드시 반미 사상이나 반미 정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미 동맹을 덜 불평등한 관계로 조정하고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은 반미 여부에 관계없이 주권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 역대 한국 정부들은 대체로 그런 자세를 취하지 못하였는데, 만약 자주성을 강조하는 어느 정부가 나타나서 그런 자세를 취하려고 한다면 한미 관계에서 어느 정도 갈등이 생길 수 있으리라 본다. 비슷한 상황이 이승만 정부에서도 일어났고, 박정희 통치 말기에도 그랬으며, 노무현 정부에서도 일어났다. 그런데 한국의 여론 주도층에서는 그런 갈등이 한국의 국익을 저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갈등이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고 북한의 도발 의지를 강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상황이 그렇게 벌어진다면 그것은 한국의 국익을 저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지 않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자주적 외교는 그 자체가 국익 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성의 고양 자체가 한국의 국익이라는 말이다. 국익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국익이 반드시 안보나 경제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정체성과 대외관계에서의 자주성 고양도 국익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한다. 대외적 자주성의 고양은 대한민국에게 주권 국가로서의 위상을 더 갖추게 해 준다. 가상의 보기로 특정 국제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독자적인 자세를 취하여 한미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러면 한국의 안보는 어느 정도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한국의 대외적 자주성은 더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손해인가 이익인가? 이런 가상의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안보에서의 국익 훼손과 국가 자주성 고취라는 국익 고양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실제 일어나는 훼손과 고양사이의 손익 계산에 달려있다. 물론 정확하고 객관적인 계산은 어려울 것이다. 또 객관적인 수치로 따지기 어려운 주관적인 가치관에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런 점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념 논쟁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기도 한다. 이에 대한 판단의 중요한 한 원칙은 국익 일부의 ‘심각한 훼손’을 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보든 자주성이든 어느 한 쪽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일을 피하는 것이 제1원칙이고, 그 뒤에 구체적인 손익 계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여론 주도층이 대외적 자주성과 주권 고양이라는 문제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안보와 경제적 이익이라는 물질적인 가치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정체성, 그리고 주권의 고양이라는 문제를 경시해 왔다. 세계 무대에서 중견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이제 이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인식이 한미동맹의 하위 행위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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