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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시계를 흔드는 남자

by 한글문화연대 2013. 12. 5.

[우리 나라 좋은 나라-11] 김영명 공동대표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시계를 흔드는 일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그 전에 하는 일이 있기는 있다. 물을 마시는 일이다. 자리끼를 머리맡에 두고 자다 일어나서 그 물을 먼저 마신다. 그리고 거실 문갑 위에 놓아둔 손목시계를 들고 흔든다.


결혼할 때 예물로 명품 시계를 받았다. 누구나 아는, 예물로 흔히 오고 가는 시계다. 상당히 비싼 시계였지만, 젊을 때는 그런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저 그러려니 하고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홀랑 잃어버리고 말았다. 학교에서 운동하러 나가서 거기에 두고 온 것이다. 운동할 때는 연구실에 벗어두고 가곤 하였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벗어두고 그냥 와버린 말을 하니 떠오르는 바보 같은 짓이 있다. 몇 해 전에 주한 미국 대사가 테니스를 좋아하여 대사관에 여러 사람을 초청한 적이 있다. 덩치가 산만한 미혼의 여성이었다. 정치학자들도 불렀던 모양이다. 나도 선배 정치학자가 연락하여 못 치는 실력에 참가하였는데, 그 뒤에 일어난 일이 참 바보 같았다. 갑자기 부름을 받고 어떤 차림으로 가야할지 몰랐지만, 운동복을 입고 가기는 그래서 간편복을 입고 갔다. 대사관 코트에 갔더니 탈의실도 따로 없고 하여 옷걸이가 있는 어느 구석에서 갈아입고 운동을 하였다. 끝난 뒤 다른 사람들이 치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동료 교수가 그만 가자고 재촉하여 라켓만 들고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 와서 보니 거기에 남긴 것이 옷이며 신발이며 댓가지는 되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실도 몰랐으니, 이게 치매의 전조인지 아닌지 참 한심하였다.


“그 친구, 왜 그렇게 재촉했지?”로는 변명이 안 되었다. 대사관에 전화하니 이리저리 사람을 바꾸어서 겨우 관계자와 얘기하고 다음날 찾으러 갔다. 처음 전화 받은 여자는 대사관에 오래 근무한 듯한 “빠다 냄새”가 났으며 고개가 빳빳할 듯한 목소리로 응대하였다. 역시 “상국”에 근무하는 자부심이랄까, “하국”을 대하는 자만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결혼 시계를 잃어버렸으니 난 이제 죽었다. 그러나 아내는 평소의 덤덤함을 이때도 보여주었다. 약간의 잔소리로 사태는 해결되었다. 나의 상실감도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예물, 명품, 그런 데 별 관심이 없던 때이므로.


그 뒤 내가 손목에 찬 손목시계들은 (그럼 손목시계를 손목에 차지 발목에 차랴?) 어디서 기념품으로 받은 싸구려들이 많았고 웬만한 것을 사서 차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 웬만한 것을 하루는 또 술을 잔뜩 먹고는 잃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시계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명품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한 자책감으로 학교 액세서리 가게에서 싸구려 중국제를 하나 샀다. 샀더니 얼마 안가 시계가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또 갔다. 그리고는 또 섰다. 가게에 가지고 가니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그러느냐고 불친절하게 대했다. 얼마 뒤에 그 옆에 있는 도장 파고 시계 고치는 아저씨에게 가지고 갔더니, 글쎄 시계 바늘이 유리에 닿아서 안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아니 시계가 그런 문제 때문에 안 가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시계는 지금도 잘 가고 있지만 손목 줄이 고장 나서 차지는 못한다. 이제 더 이상 손목시계가 아니라 머리맡 시계가 되었다. 그리고 앞의 그 시계는 며칠 뒤 찾았다. 침대와 벽 사이에 떨어져 있었다.

나이가 드니 슬슬 좋은 시계가 차고 싶어졌다. 이 나이에 싸구려 기념품 시계만 찰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압구정동에 소일 삼아 나갔다가 “중고 명품”이라고 써 놓은 가게들이 몇 군데 있는 것을 보았다. 들어가 보니 중고 명품 시계들이 많았다. 내가 잃어버린 것과 흡사한 것들도 있었다. 이삼일 생각하다가 에라 하면서 가서 하나 구입했다. 잃어버린 예물 시계와 같은 것이지만, 아주 똑 같지는 않았다. 꽤 많은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시계가 제작된 해가 내가 결혼 시계를 잃어버린 해와 같은 1995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설마 그 시계가 그 시계는 아니겠지?


그런데 이 시계는 차고 다니거나 흔들어주어야 가는 시계다. 밖에 항상 나가지는 않는 직업 탓에 시계 차는 시간도 짧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시계는 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세우기가 싫다. 그래서 집에서도 차고 있거나 눈에만 보이면 수시로 흔들어준다. 산 지 열 달쯤 되었는데 흔들어주어야 하는 양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밤에 흔들어주고 잔 뒤 일어나면 서 있을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시계를 더 열심히 흔든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계부터 찾아 흔든다. 그것도 꼭 귀에다 대고. 절겅절겅하는 소리를 들어야 속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시계에 매달려 사는 인생이 되었나?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시계 덕분에 나는 또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으냐? 절겅절겅 내 시계. 나는 오늘도 시계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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