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좋은 나라-12] 김영명 공동대표
1987년 민주화가 된 이후 우리 민주주의는 그런 대로 착실히 전진해 왔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꼴들을 보니 참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사실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나 인권 같은 것들이 후퇴한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인 것 같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민주주의는 후퇴한다고 해도 그냥저냥 되고 있는데, 도무지 정치다운 정치가 없다는 말이다.
노무현 때부터 시작해 보자. 이른바 3김 씨가 정치 전면에서 사라지니 지역에 바탕을 둔 일인 보스 패거리 정치가 사라지는가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메꾼 것은 법과 제도에 기반한 착실한 민주 정치가 아니라 권위 부재의 좌충우돌 난장판이었다. 노무현은 권위를 탈피하고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훌륭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힘도 없는 사람이 그 일을 해치우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무리였을 뿐 아니라,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 보인 언행은 국가를 분열시키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야당 투사 같은 모습이었으니, 일은 일대로 안 되고 시끄러울 뿐이었다. 그가 택한 마지막도, 안 된 얘기이긴 하나, 그다운 모습이었다.
노무현 임기가 끝나가자 국민 대다수가 그에게 염증을 내었다. 이 기회를 매우 잘 포착한 사람이 이명박이었다. 그의 ‘경제 살리기’ 구호에 창수 아빠도 영이 엄마도 다 넘어갔다. 참 어리석은 백성들이었다. 그가 공공연히 내건 정책들이 모조리 부자를 살찌우고 서민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이었는데, 창수 서민 영이 서민이 너도나도 이명박을 외쳤으니 말이다.
이명박은 한 마디로 건설회사 사장 이상이 못 되었다. 아니 좀 봐줘서 건설회사 회장이라고 해 주자. 한반도 대운하라는 대규모 토건 사업만 머리에 박혀 있고 도무지 정치가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려고 했던, 개방과 경쟁에 입각한신자유주의 정책들이 한국 사정에 너무 안 맞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고, 서민이니 복지니 공생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좋은 말들이었으나 그냥 말 뿐이었다.
임기 말이 되자 노무현 때만큼이나 인기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노무현을 비웃는 것만큼이나 이명박을 비웃게 되었다. 둘이 다른 점은 노무현에게는 열혈 지지자와 열혈 혐오자가 모두 있었던 반면 이명박에게는 그냥 비아냥만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명박은 아직도 사람들이 자기를 왜 욕하는지를 아마 모를 것이다. 그 정도의 안목과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한나라당 경선에 참여한 정몽준과 다른 이들이 경선 규정을 바꾸자고 줄기차게 외쳤지만 박근혜는 깔아뭉개기로 일관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나는 그때 박근혜가 독재자의 소질을 갖춘 위험한 인물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는 참신한 이미지의 여성 정치인이었다. 신뢰와 원칙! 얼마나 아름다운 말들인가? 한국 정치에 야바위가 너무 성하니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도대체 무엇에 대한 신뢰이고 무슨 원칙인지가 아리송했다. 지금 보니 신뢰는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고, 원칙은 자기 뜻대로 한다는 원칙인 것 같다.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는 복지와 국민 대통합을 외쳤다. 많이 주워들었나 보다. 보좌진들의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당시나 지금에나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이 바로 복지 증진과 국민 대통합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어디로 갔나? 복지 증진이야 어차피 세금 안 올리면 안 되는 일인데, 박근혜가 그걸 몰랐던지 알아도 선거전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지, 그렇다고 해 두자.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무슨 정책을 추구하고 안 하고 이런 저런 이념을 따르고 안 따르고가 아니다. 정책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은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이념이 별 차이가 없고, 이석기니 가스통 할배니 하는 사람들은 시끄러우나 한 줌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별 차이도 없는 인간들이 당파 이익을 위해 죽자 살자 싸우고, 어리석은 백성들도 덩달아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이다.
이런 조잡한 갈등 상황을 정리하고 나라가 발전하려면 작은 차이로 크게 싸우는 것을 잘 조정하고 통합할 ‘정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 대통합을 이룰 큰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 이념 격차도 별로 크지 않는 상황에서 국민 대통합을 얘기해야 하니 참 한심할 따름이다. 유럽 나라들의 정파들은 이념 격차가 우리보다 훨씬 더 큰데도 조잡한 당파 싸움이 덜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이념 갈등이 아니라 당파 싸움이고 이를 통합할 지도력이 없다는 점이다.
노무현도 이명박도 박근혜도 지도자의 자질이 없다. 야당 투사와 건설회사 사장과 유아독존 성처녀는 모두 국민 대통합의 정치 지도자가 못된다. 앞으로는 누가 있을까? 당장은 안 보이니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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