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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말하는 기술

by 한글문화연대 2013. 12. 12.
[우리 나라 좋은 나라-13] 김영명 공동대표

 

얼마 전에 신문 기사를 보니 청룡 열차를 같이 타고 난 뒤에 사랑 고백을 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 재난에서 같이 살아남은 남녀가 사랑에 빠질 가능성도 보통 때보다 더 높다고 한다. 여름철 바닷가에서 만난 남녀가 쉽사리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런 상황들이 사람들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비상 상황들은 성격상 오래 지속되지 않아 정상 상태로 돌아가면 사람들의 감정도 평상시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그러니 바닷가에서 만난 남녀들이여, 그대들의 연애가 오래 못 가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지어다.

 

이를 보면 상황이라는 요인이 사람들 삶과 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말이든 행동이든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절대 진리라 생각된다.

 

오래 전에 대학교 다닐 때 단과대학 대항 야구 시합이 있었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어릴 때 동네 애들하고 찜뽕이나 야구를 많이 한 기억이 있어서 자원해서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녀석 하나가 괜스레 쓸데없이 공을 마구 세게 던지는 것이었다. ‘별 이상한 놈도 다 있네하였는데 결국 그 녀석은 탈락했다. 별달리 잘하지 못하는 녀석이 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무리를 한 것이라 생각된다.

 

야구에서 공을 세게 던져야 할 때가 있고 살살 던져야 할 때가 있듯이, 말도 세게 해야 할 때가 있고 살살 해야 할 때가 있다. 여기서 때라 함은 때와 장소를 합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옳은 말도 해야 할 때가 있고 안 해야 할 때가 있다. 지하철이 고장 나 서 있고 냉방기마저 가동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짜증나 죽겠는데, 장미꽃을 바치면서 사랑 고백을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재미로 그가 남자라고 하자)이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이런 이상한 사람하고 어떻게 사귀겠는가?

 

지난 대선 때 이정희 후보가 텔레비전 토론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박근혜가 되겠구나하고 생각한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말 내용도 그렇지만 그녀의 태도와 인상이 거부감을 주었다. 그뿐 아니다. 이정희가 박근혜의 아버지가 창씨 개명한 다카기 마사오였다고 폭로(?)한 순간 박근혜는 적어도 수십만 표는 더 가져갔을 것이다.

 

이정희가 한 그 말은 공론장에서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던 박정희의 창씨개명과 관동군 복무 이력을 공개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역효과를 낼 수밖에 없었다. ? 우리는 모두가 친일 청산을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진정으로 친일 청산을 원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이 잠재적인 다카기 마사오들인데 거기다 대고 다카기 마사오 운운 하니, 모두가 말은 못하고 부끄러운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감히 우리의 치부를 건드리다니.

 

오래전 1980년대 후반이라 기억된다. 당시 야당(신민당? 하도 바뀌니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국회의원 하나가 통일이 무엇보다 우선한 가치라고 국회에서 선언하여 정계가 발칵한 적이 있다. 바로 용공으로 몰리고 당시 시급했던 민주화의 현안이 한동안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들이 요사이도 계속된다. 정치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조금 진행되려고 하면 느닷없는 돌출 발언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는다.

 

그런 일이 계속 되니 민주주의 정착과 국정 쇄신의 큰 문제는 사라지고 남는 건 그저 종북이니 사퇴니 제명이니 하는 싸움박질밖에 없다.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중요한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근데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나보고 육갑한다고? 너 몇 살이나 먹었어?”하는 싸움박질이나 하고 있는 꼴이다. 싸움을 해도 좀 크게 싸워보자. 그게 무슨 꼴들인가?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안 해야 할 때가 있다. 말을 안 해야 할 때 안 하는 것도 말하는 기술이다. 말을 할 때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현으로 해야 할지 잘 알아야 한다. 심사숙고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그런 것들을 잘 가릴 줄 아는 혜안을 먼저 길러야 한다. 그런 혜안은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것이기도 하고 수련으로 닦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타고나지 못했으면 닦기라도 하자. 말하는 기술, 우리는 이것에 너무 서투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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