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글아리아리

한글 아리아리 453

by 한글문화연대 2013. 12. 5.

한글문화연대 소식지 453
2013년 12월 5일
발행인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

한글문화연대 바로가기

  ◆ [올바른 높임말] 사람을 제대로 높일 때 나도 존중받습니다.

■ 일터에서 6. 부장님, 수고하세요.

사무실에서 먼저 퇴근할 때에, 남아서 일하는 사람에게 “수고하세요.”, “수고하십시오.”라고 인사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때의 “수고”는 ‘무슨 일에 힘들이고 애씀’이란 뜻을 가진 낱말이다. 그러므로 “수고하세요.”란 말은 ‘힘들이고 애쓰라’는 뜻이 되어 그리 바람직한 인사말은 아니다. 이때는 “안녕히 계십시오.”라든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정도의 인사말이 알맞다.
그렇다고 ‘수고’라는 말을 쓰는 것이 모든 경우에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수고하십시오.”처럼, 이 말을 명령형으로 쓰는 것은 잘못이지만, “수고하셨습니다.”든지, “수고가 많으십니다.”는 말은 예의에 어긋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 높임말은 사람을 존중하는 우리말의 아름다운 표현법입니다. 올바른 높임말 사용을 위해 한글문화연대가 만든 책자 "틀리기 쉬운 높임말 33가지"는 ▶이곳에서 내려받아 볼 수 있습니다.

  ◆ 시민의 예의를 잃지 않는 말 문화를 키우자_이건범 상임대표

올 여름에 어느 텔레비전 방송의 코미디에서 '~하고 가실게요'라는 잘못된 높임말을 사용하길래 이를 고쳐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9월초 그 방송 꼭지 첫머리에 이것이 잘못된 말투라는 자막이 떴다. 문제는 그 다음날 벌어졌다. 책임 감독이라는 분이 "해당 단체에게 답변 공문만으로 끝낼 수 있지만, 이런 지적을 받고 있다는 걸 시청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다"며 굳이 자막을 넣은 까닭을 언론에 털어놓은 것이다. 코미디 만들기 어려운 사정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방송의 최고 권력자인 시청자에게 한글 단체 좀 혼내달라는 식으로 말한 셈이다.

나는 당장 논평을 써서 이 고약함을 꼬집었다. 내가 대표로 있는 한글문화연대에서 코미디 제작진에게 뭔가 바로잡아달라는 공문을 보낸 일은 처음이었던지라 좀 억울했다. 게다가 우리 단체가 뉴스나 다큐멘터리에 댈 잣대를 코미디에 내밀 정도로 속 좁은 곳은 아니다. 개그맨들이 만들어내는 유행어는 좀 지나면 시들해지므로 일일이 따질 필요도 없거니와 창작의 자유 또한 매우 소중한 가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잘못된 높임말은 여느 유행어와는 달리 이미 병원이나 한의원, 미용실 등에서 굳어져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고, 그 코미디가 여기에 무임승차하여 잘못된 높임말을 정당화하며 퍼뜨리는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작의 어려움을 털어놓기엔 좀 어설프고 궁색한 구석이 있었다.

이 논평이 나간 직후 인터넷 기사 밑에는 나를 비난하는 댓글과 그 코미디 방송을 비난하는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그 댓글들을 읽다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양쪽의 댓글에서 나는 매우 심한 욕설과 막말을 셀 수 없이 만났다. 내 논평을 비난하는 사람도 욕설을, 내 뜻에 공감하는 사람도 그 감독을 비난하는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비는 똘아이'가 되어 있었다. 뭐라 한 마디 쓰고 싶었지만, 차마 발을 담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코미디 관련 기사에 붙는 반응이 이럴진대 날카롭게 대립하는 정치 기사라면 어떻겠는가? 물론 각목과 쇠파이프 들고 서로 피 튀기며 싸우는 짓보다야 낫다. 그러나 이렇게 위로하기엔 사람이라는 존재가, 시민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초라하다. 나는 이런 말 문화가 시민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해치고 다양한 공론장에 시민이 참여할 의욕을 떨어뜨린다고 본다. 우리 헌법에서 밝히고 있는 민주공화국이란 시민이 누구로부터도 자의적으로 지배받지 않을 자유와 인간 존엄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활용하여 스스로 지배하는 정치 체제이다. 그런데 욕설과 막말이 난무한대서야 어디 더러워서 그런 판에 참여하고 싶겠는가? 시민의 예의를 잃지 않는 말 문화가 절실하다.

그렇지만 이 같은 문제의 책임을 시민 개개인에게만 돌려서는 곤란하다. 비록 이런 말 문화가 불편하다고는 해도 그것은 시민들이 일상 생활에서 받고 있는 다양한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고, 정치와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해서 생기는 울분의 표현일 수도 있고, 불의라고 느끼는 사태에 항거하는 자기 방식의 의사 표현일 수도 있다. 당파적 이기심에서 이런 말 문화를 부추겨온 정치인이나 언론의 책임이 더 큰 것 같다. 특히나 정치적 반대자의 이마에 딱지를 붙이는 대화 방식은 모든 근거와 중간 이야기를 생략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에게 '악마'라는 규정을 내리는 전형적인 폭력 대화다. 내가 '똘아이'가 된 것처럼.

시민의 예의는 단지 겉치레가 아니다. 표현이 우아하더라도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무시하고 배제의 공포를 자극하는 말이라면 그런 말 역시 시민의 예의에 걸맞지 않다. 예의는 우리가 다른 시민을 나와 같은 시민으로 대접하고자 하는, 그래서 우리가 모두 민주공화국의 동등한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태도다. 내가 응원하는 프로레슬링 선수가 병따개로 상대방 이마를 짓찧어 이겨도 통쾌하다면, 나는 내 정신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 이 글은 2013년 11월 28일 한국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 [우리말 이야기] '사리'와 '개비'_성기지 학술위원

‘사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에서 “가느다란 실이나 줄을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 ‘사리다’인데, ‘사리’는 바로 이 ‘사리다’의 명사형이다. ‘사리’는 이렇게 실이나 줄을 사려서 감은 뭉치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이 뭉치들을 세는 단위명사이기도 하다. 가령 철사나 새끼줄 따위는 둘둘 감아서 보관하는데 이렇게 감아놓은 뭉치를 셀 때 “철사 한 사리, 두 사리”, “새끼줄 한 사리, 두 사리”처럼 말한다.

철사나 새끼줄과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면발을 둘둘 감아놓은 뭉치도 사리로 센다. 음식점에서 국수를 먹을 때, 국물은 남았는데 양이 덜 차게 되면 면을 추가로 주문한다. 이때 면을(정확히는 면을 둘둘 감아놓은 뭉치를) 따로 시키려면 “면 한 사리 더 주세요.”라고 말하면 된다. 물론 ‘사리’는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면을 세는 단위로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리’가 면이나 덤인 것으로 오해하게 되면, 면은 사라지고 그냥 단위만 써서 “사리 주세요.”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나아가서 밥 한 공기를 추가로 주문할 때도 “사리 주세요.” 하는 엉뚱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마치 문구점에 가서 연필을 산 뒤에 추가로 주문하면서 그냥 “자루 주세요.” 하는 것과 한가지이다.

‘자루’라는 말도 가끔 ‘개비’와 혼동된다. ‘자루’와 ‘개비’는 둘 다 길고 곧은 물건을 셀 때에 쓰는 단위명사인데, 손잡이가 있거나 그 안에 심이 들어 있는 것일 때에는 ‘자루’를 쓴다. 그래서 손잡이가 있는 삽이나 지팡이 같은 물건을 셀 때에도 ‘자루’고, 심이 들어 있는 연필을 셀 때에도 ‘자루’이다.

하지만 길고 곧은 물건 가운데 손잡이도 없고 심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주로 ‘개비’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그래서 장작을 쪼갠 것도 ‘장작 한 개비’처럼 ‘개비’를 쓰고, 담배를 낱개로 셀 때에도 ‘담배 한 개비’라고 말한다. (이때, ‘개피’나 ‘가치’는 모두 비표준말이다.) 제사상에 피우는 향을 셀 때에도 ‘향 한 자루, 두 자루, …’가 아니라 ‘향 한 개비, 두 개비, …’라고 말해야 한다.

  ◆ [우리나라 좋은 나라] 시계를 흔드는 남자_김영명 공동대표

1987년 민주화가 된 이후 우리 민주주의는 그런 대로 착실히 전진해 왔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꼴들을 보니 참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사실 한국 민주주의의 후퇴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나 인권 같은 것들이 후퇴한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인 것 같다. 무슨 말인고 하니, 민주주의는 후퇴한다고 해도 그냥저냥 되고 있는데, 도무지 정치다운 정치가 없다는 말이다.

노무현 때부터 시작해 보자. 이른바 3김 씨가 정치 전면에서 사라지니 지역에 바탕을 둔  일인 보스 패거리 정치가 사라지는가 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메꾼 것은 법과 제도에 기반한 착실한 민주 정치가 아니라 권위 부재의 좌충우돌 난장판이었다. 노무현은 권위를 탈피하고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훌륭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힘도 없는 사람이 그 일을 해치우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무리였을 뿐 아니라,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 보인 언행은 국가를 분열시키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야당 투사 같은 모습이었으니, 일은 일대로 안 되고 시끄러울 뿐이었다. 그가 택한 마지막도, 안 된 얘기이긴 하나, 그다운 모습이었다.

노무현 임기가 끝나가자 국민 대다수가 그에게 염증을 내었다. 이 기회를 매우 잘 포착한 사람이 이명박이었다. 그의 ‘경제 살리기’ 구호에 창수 아빠도 영이 엄마도 다 넘어갔다. 참 어리석은 백성들이었다. 그가 공공연히 내건 정책들이 모조리 부자를 살찌우고 서민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이었는데, 창수 서민 영이 서민이 너도나도 이명박을 외쳤으니 말이다.

이명박은 한 마디로 건설회사 사장 이상이 못 되었다. 아니 좀 봐줘서 건설회사 회장이라고 해 주자. 한반도 대운하라는 대규모 토건 사업만 머리에 박혀 있고 도무지 정치가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려고 했던, 개방과 경쟁에 입각한신자유주의 정책들이 한국 사정에 너무 안 맞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고, 서민이니 복지니 공생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좋은 말들이었으나 그냥 말 뿐이었다.

임기 말이 되자 노무현 때만큼이나 인기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노무현을 비웃는 것만큼이나 이명박을 비웃게 되었다. 둘이 다른 점은 노무현에게는 열혈 지지자와 열혈 혐오자가 모두 있었던 반면 이명박에게는 그냥 비아냥만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명박은 아직도 사람들이 자기를 왜 욕하는지를 아마 모를 것이다. 그 정도의 안목과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한나라당 경선에 참여한 정몽준과 다른 이들이 경선 규정을 바꾸자고 줄기차게 외쳤지만 박근혜는 깔아뭉개기로 일관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나는 그때 박근혜가 독재자의 소질을 갖춘 위험한 인물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는 참신한 이미지의 여성 정치인이었다. 신뢰와 원칙! 얼마나 아름다운 말들인가? 한국 정치에 야바위가 너무 성하니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도대체 무엇에 대한 신뢰이고 무슨 원칙인지가 아리송했다. 지금 보니 신뢰는 자신을 믿으라는 것이고, 원칙은 자기 뜻대로 한다는 원칙인 것 같다.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는 복지와 국민 대통합을 외쳤다. 많이 주워들었나 보다. 보좌진들의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당시나 지금에나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이 바로 복지 증진과 국민 대통합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어디로 갔나? 복지 증진이야 어차피 세금  안 올리면 안 되는 일인데, 박근혜가 그걸 몰랐던지 알아도 선거전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지, 그렇다고 해 두자.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무슨 정책을 추구하고 안 하고 이런 저런 이념을 따르고 안 따르고가 아니다. 정책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은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이념이 별 차이가 없고, 이석기니 가스통 할배니 하는 사람들은 시끄러우나 한 줌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별 차이도 없는 인간들이 당파 이익을 위해 죽자 살자 싸우고, 어리석은 백성들도 덩달아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이다.

이런 조잡한 갈등 상황을 정리하고 나라가 발전하려면 작은 차이로 크게 싸우는 것을 잘 조정하고 통합할 ‘정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 대통합을 이룰 큰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 이념 격차도 별로 크지 않는 상황에서 국민 대통합을 얘기해야 하니 참 한심할 따름이다. 유럽 나라들의 정파들은 이념 격차가 우리보다 훨씬 더 큰데도 조잡한 당파 싸움이 덜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이념 갈등이 아니라 당파 싸움이고 이를 통합할 지도력이 없다는 점이다.

노무현도 이명박도 박근혜도 지도자의 자질이 없다. 야당 투사와 건설회사 사장과 유아독존 성처녀는 모두 국민 대통합의 정치 지도자가 못된다. 앞으로는 누가 있을까? 당장은 안 보이니 답답한 노릇이다.

'한글아리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글 아리아리 454  (0) 2013.12.19
한글 아리아리 454  (0) 2013.12.12
한글 아리아리 452  (0) 2013.12.05
한글 아리아리 451  (0) 2013.11.21
한글 아리아리 450  (0) 2013.11.1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