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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아리아리

한글 아리아리 456

by 한글문화연대 2014. 1. 3.

한글문화연대 소식지 456
2014년 1월 3일
발행인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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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에도 한글문화연대는 달립니다!

  ◆ [올바른 높임말] 사람을 제대로 높일 때 나도 존중받습니다.

■ 집에서 10. 예, 저도 들겠습니다.

손윗사람이 “자네도 많이 드시게.” 하고 음식을 권할 때에도 높임말에 주의해서 대답해야 한다. 흔히 “예, 저도 들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데, 이는 예의에 어긋난다. ‘들다’는 어른 앞에서 ‘먹다’를 높이거나, 동년배나 손아랫사람에게 점잖게 말할 때에 쓰는 말이다. “손님, 많이 드십시오.”, “자네, 점심 들었나?”처럼 쓴다. 반면에 자신의 행위에는 ‘들다’가 아닌 ‘먹다’를 써야 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자네도 좀 들게.” 하면, “예, 저도 먹겠습니다.”로 대답한다. 어른 앞에서 “저도 들겠습니다.” 하는 말은 예의에 어긋난다.

물론 웃어른에게 “드십시오.” 하는 말보다는 “잡수십시오.”가 더욱 정중한 말이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으신 분께는 “할아버지, 더 잡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예절이다. ‘음식을 들다’는 ‘음식을 먹다’의 또 다른 표현일 뿐, 그 자체가 높임말은 아니다. ‘먹다’의 높임말은 ‘잡수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높임말은 사람을 존중하는 우리말의 아름다운 표현법입니다. 올바른 높임말 사용을 위해 한글문화연대가 만든 책자 "틀리기 쉬운 높임말 33가지"는 ▶이곳에서 내려받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말 이야기] 하루를 어떻게 나누어 부를까?_성기지 학술위원

갑오년 새해가 큰 추위 없이 환하게 밝았다. 이맘때가 한 해의 첫머리라면, 하루의 첫머리는 새벽이다. ‘새벽’은 “막 먼동이 트려고 하는, 날이 밝을 무렵”을 가리키는 말이다. 새벽을 또 나누어, 아주 이른 새벽은 ‘꼭두새벽’이라 하고, 아직 어스레한 새벽은 ‘어둑새벽’이나 ‘어슴새벽’이라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정이 지나 아침이 되기 전까지를 그냥 새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새벽 1시’, ‘새벽 2시’라고 보도하는데 이것은 합리적인 표현이라 볼 수 없다. 이때는 ‘낮 1시, 낮 2시’와 대비하여 ‘밤 1시, 밤 2시’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현대인에게 오전 1시는 아무래도 새벽이라기보다는 밤이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하루는 크게 낮과 밤으로 나눌 수 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가 낮이고, 해가 진 뒤부터 다시 뜰 때까지를 밤으로 본다. 날이 샌 뒤부터 첫 반나절 동안을 ‘아침’이라 하니까, 아침이 지난 뒤에 낮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아침과 낮은 동시에 시작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해는 졌지만 아직은 빛이 남아 있는 때를 ‘저녁’이라 하니까, 저녁과 밤도 같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루는 자정에서 시작되어 자정에서 끝나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 계산상 그렇다는 것이고, 날이 밝고 어두움에 따른 우리말은 이와 별개로 있어 왔다. 그래서 자정이 지나 오전 1시, 2시가 되어도 이를 새벽이라 하지 않고 아직 해가 뜨기 전이므로 밤 1시, 밤 2시라 부르는 것이다.

흔히 한나절, 반나절이라 하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나절’은 하루 낮의 절반을 뜻하는 말이다. 하루 낮이 해가 떠있는 동안이므로 대략 12시간이라 한다면, 나절은 그 절반인 6시간 가량이다. 그러니까, 한나절이라 하면, 해가 떠 있는 동안 가운데 아침나절의 3시간 정도와 저녁나절의 3시간 정도를 뺀, 가장 해가 높이 떠 있는 6시간 가량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을 나누어 보면, ‘반나절’이라는 말은 한나절의 다시 절반이니까 대략 3시간 가량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해의 다짐?_김영명 공동대표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또 한 해가 밝았다. 헌 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또 한 살을 더 먹었다. 늘 그랬듯이 별다른 감흥은 없다.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이 되던 세밑에는 기분이 좀 묘했다. 미국 유학 시절이었는데, 그래서 유학생 친구 집에 모여 술을 퍼 마셨다. 기분이 묘하지 않았더라도 술은 퍼 마셨겠지만…

그 뒤로는 새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별로 묘한 기분은 없다. 스물일곱이 되는 아들 녀석이 헌 해의 마지막 날에 기분이 좀 이상하다고 카톡을 보냈더군. 내 대답은 “다 그러니 일찍 들어오기나 해!”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통행금지가 없는 날이라 그 핑계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지금 내 아들은 훨씬 더 진하게 같은 짓을 한다. 통금은 만날 없는데도… 결혼해서 춘천에 살 때는 세밑에 서울 부모님 댁에 식구들 내려놓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밤 12시쯤 집에 갔다. 다음 날 차례 지내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요양원에 계시니 이제 그럴 일도 없다. 그저 새해가 온다고 흥분하는 텔레비전에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보신각 종 치는 것까지는 봐 주고 잔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이런 저런 소원을 빌고 이것 저것 다짐도 한다. 나는 무슨 소원을 빌까? 나, 가족, 친지들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 그리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한 곳이 되기를 빈다. 그런데 이런 정도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일테니, 내게는 딱히 뭐라고 할 만한 소원이 없나 보다. 내가 새로 시작한 취미 활동이 잘 되기를 하나 추가한다. 그것이 나의 특별한 소원이라면 소원이겠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과의 친애도 기대한다.

그럼 다짐은 어떤 걸 할까? 올해는 담배를 끊겠다, 인터넷 게임을 덜 하겠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 술을 덜 마시겠다. 사람들은 이런 다짐들을 한다. 내게는 다 해당되지 않는다. 명색이 교수이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것은 해당될지 모르나, 내 전공인 정치학 공부는 더 이상 별로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타고난 기질이 있으니 책을 놓지는 않지만…

담배는 이십대 때 조금 피우다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 두었고, 술은 덜 마시겠다고 수없이 다짐하기도 했지만, 그건 과음한 다음 날 얘기지 딱히 새해의 다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다짐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이가 드니 과음은 저절로 안 하게 되고 술 약속을 잡는 일도 없어졌다. 과음하던 젊은 날을 아쉬워해야 하나? 그러나 전혀 그렇지는 않다.

하나 특별히 다짐을 할 게 있다면 좀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까? 어릴 적의 나는 부끄러움을 무척 타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는데, 십대 중반 이후 조금씩 깡패 같은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요새도 낯을 가리는 편이고 아직도 남에게 이것저것 권하는 성격은 못 되지만, 사람들은 나더러 ‘나쁜 남자’ 스타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기도 하고, 인상파라고 하기도 하고, 어렵다고 하기도 한다.

학생이나 제자들의 “교수님은 그게 매력이에요!”라는 엉터리 말에 너무 오랫동안 속아왔던 것 같다. 그러면서 돌아서서 욕하지 않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겠지. 아직도 날 찾는 제자들이 있으니…

하지만 세월도 가고 나이도 먹어 가는데 그런 평을 계속 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새해에는 나쁜 남자를 버리고 좋은 남자로 거듭나야겠다. 그런데 나쁜 남자가 도대체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야말로 ‘나쁜 놈’은 아닐테고, 곰살맞고 부드럽고 자상하고 싹싹하고, 이런 것의 반대일까?

하긴, 나는 돌직구를 잘 날리는 편이다. 꼭 남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래야 속이 시원하기 때문이다. 에둘러 말하기는 내게 힘들다. 이런 것을 나이답게 좀 고쳐볼까? 동창들 야구 하는데 원래 잘 하던 녀석들이 어깨 고장 나고 무릎 고장 나고 하여 잘 못한다. 그래서 내가 투수를 한다. 아니, ‘했다’라고 해야겠다. 이제 야구하는 일도 점점 없어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투수를 잘 하기 위하여 레슨도 받았다. 슬라이드와 커브 던지는 방법도 배웠는데, 잘 되지는 않고 역시 직구가 쉽기는 쉽다. 그래도 투수를 잘 하려면 역시 변화구도 잘 던져야 한다.

이젠 직구만 날리지 않고 슬라이드, 커브도 좀 써야겠다. 새해엔 부드러운 남자가 되어 볼까? (가능할까?)

  ◆ 대접받고 싶다면 대접하라_이건범 상임대표

유럽의 축구장 안팎에서 난동을 일삼던 훌리건의 악명은 이제 차별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백인과 피부색이 다른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바뀐 현상이다. 훌리건만 해도 축구에 열정을 지닌 집단이었지만, 차별주의자들은 인종 차별에 대한 광적인 열정만 있을 뿐이다. 독단의 결과다.

우리 사회에서도 독단과 편견에서 비롯하는 증오 표현이 늘고 있다. 정치인의 막말,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언어폭력, 청소년의 욕설, 상대를 절벽으로 몰아가는 방송의 날선 말. 그나마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이 높은 공공 분야에서 정부가 쉬운 공공언어 정책을 펴나가겠노라고 밝힌 점이 다행이랄까.

‘말 문화’ 문제가 나오면 어른들은 곧바로 청소년 욕설을 떠올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청소년들이 추임새처럼 입에 달고 사는 욕설을 버스 안이나 거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어서다.

우리의 말이 거칠어지는 첫째 까닭은 모두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경쟁 속에서 짜증이 나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둘째로 대화 방식의 문제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무례하지 않은 비판과 토론을 이어 가며 생각의 덩어리를 키워야 하는데, 우리는 그 점에서 너무 서툴다. 대화 방법을 못 배워서 그렇기도 하고, 강한 사람처럼 보여야 유리하다는 생존 전략도 깔려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짜증 나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배설만 해서 될 일은 아니다.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 과정에 참여해 제도와 법과 관행을 바꾸어야 한다. 정치는 직업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공화국은 남에게 제멋대로 지배당하지 않을 자유와 인간 존엄의 평등을 지키기 위해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이용해 시민이 스스로 지배하는 정치 공동체다. 시민의 정치 참여는 권리이자 더 나은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시민적 덕성이기도 하다. 인터넷 같은 공론장에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시민이 참여하는 정치일진대, 욕설과 온갖 딱지 붙이기, 모욕과 조롱이 난무한대서야 어디 누군들 그런 생활 정치에 발을 담그고 싶겠는가. 동등한 시민으로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시민적 예의가 절실하다.

* 이 글은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 쓴 글로 동아일보 2014년 1월 1일 사회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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