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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 나라 좋은 나라(김영명)

엄마와 바나나

by 한글문화연대 2014. 3. 27.

[우리 나라 좋은 나라-25] 김영명 공동대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는 먹을 것을 많이 찾으신다. 이것저것 드리지만 만만한 것이 바나나라서 바나나를 자주 드린다. 우리는 바나나 껍질을 반만 까고 먹지만,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거추장스러울까봐 껍질을 다 까고 알맹이만 드린다. 반 잘라 드릴 때도 있고 다 드릴 때도 있다. 어머니는 그것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조금씩 잘라 드신다. 이 없는 입으로 오물오물 잘 드신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손이 끈적끈적해지지 않을까 궁금했다. 한 동안 궁금해 하기만 하다가 어느 날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나도 바나나 껍질을 다 까고 알맹이만 들고 먹어보았다. 생각보다는 끈적한 것이 많이 묻지 않아 괜찮았다.


바나나 하면 많은 것이 생각난다. 우리 어릴 적에는 바나나가 무척 귀하고 비쌌다. 중학교 2학 때인가 엄마가 아버지에게 우리는 어째 나들이도 한 번 안 가냐고 잔소리를 하여, 아버지가 큰 맘 먹고 엄마, 나, 여동생을 데리고 동래 금강원에 소풍을 갔다. 도시락을 싸 들고 가서 산기슭 풀밭에서 먹고 온 게 다였다.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내리니 가게에서 바나나를 팔고 있었다. 엄마의 압력이 있었던지 아버지는 바나나를 사셨다. 단 한 알을. 어머니를 “어쩌면  하나밖에 안 사나?” 하고 투덜거리셨다. 그 바나나를 누가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유학 온 나는 가을까지 학교 근처 가회동에서 하숙을 했다. 처음에는 대학생 형 하고 살았는데, 가을에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한 동안 같은 방에 기거했다. 요즘 가보니 그때 그 집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 해 박는 집” 치과 바로 옆집이다. 근데 그런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그때 하숙집에서 어느 날 바나나를 하나 주었다. 그때 그 황금 맛을 잊을 수 없다. (사실은 다 잊었다. 그냥 표현일 뿐이다.)


요사이는 바나나가 무척 흔하고 값싸졌지만 예전에는 정말 귀했다. 그리고 맛있었다. 오죽하면 이런 놀이 노래가 있으랴. “... 맛있는 것은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빠르다 빠른 것은 비행기...” 귀한 것의 대명사 바나나여, 오늘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고?


결혼을 하고 서울 월계동에서 살 때이다. 그때도 여전히 바나나는 비쌌다. 지금 크기의 2/3 정도밖에 안 되는 바나나 한 알이 당시 돈으로 천 원이었다. 참고로 당시 짜장면(요새는 자장면이지만 그때는 짜장면이었다) 한 그릇 값이 월계동에서 구백 원이었다. 지금 잠실에서 자장면 값이 사천 오백 원이니, 그렇게 환산하면 지금 조그만 바나나 한 알이 오천 원이라는 얘기 아닌가? 놀라울 뿐이다.


아내 말이, 그때 월계동에서 내가 아버지 아들답게 바나나 한 알밖에 안 사왔다고 한다. 아이가 있었을 땐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 한 몸 희생하여 아내 먹이려고 했겠지(??) 그러면서 어찌 그리 아버님하고 똑같냐고 한다. 근데 난 한 개를 샀는지 두 개를 샀는지 기억에 없다. 단지 한 다발을 사는 미친 짓을 내가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야지. 바나나 한 알에 얽힌 추억이 여러 가지로구나. 어머니는 바나나를 만지작거리다 돌아가시겠지. 나는 그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바나나를 먹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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