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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우리말 비빔밥(이건범)

국어 순화 비판은 시대착오

by 한글문화연대 2020. 6. 11.

국어 순화 비판은 시대착오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국어 순화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추켜세우고자 민족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 오늘날의 국어 순화는 언중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외국말을 쉬운 우리말로 바꿈으로써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쪽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국어 순화라면 무조건 과거의 관점대로 민족주의, 아니 심지어는 국수주의에 쏠린 움직임이라고 여기면서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재는 시대착오가 아닌가 걱정스럽다.


 일본어 ‘벤또’ 대신 ‘도시락’을, 영어 ‘스크린도어’ 대신 ‘안전문’을 쓰자는 게 외국어 남용에 대처하는 국어 순화다. 우리말이 있다면 외국말 대신 우리말을 쓰고, 마땅한 우리말이 없다면 새롭게 만들어서라도 되도록 우리말을 쓰자는 국어 정책, 운동이다. 그렇게 새로 만든 말 가운데 네티즌을 대신할 말로 ‘누리꾼’이 자리를 잡았고, 북마크 대신 ‘즐겨찾기’가 널리 쓰인다.


 그러나 국어운동계에서 벌이는 국어 순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영어 남용은 나날이 늘어만 간다. 그 양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전에는 우리말로 쓰던 것을 외국말로 바꾸어 쓰는 경향이다. ‘발열 검사’라고 할 것을 ‘발열 체크’라고 한다거나, ‘의견, 여론’ 대신 ‘오피니언’을, ‘사업’ 대신 ‘프로젝트’를, ‘사실’ 대신 ‘팩트’를 쓰는 경향이다. 쓰던 말 때신 영어 낱말을 사용하면 조금 더 신선하거나 있어 보이더라는 경험이 아예 편견으로 굳어 그렇다.

 둘째, 새로운 문물이나 개념, 현상, 기술을 외국에서 들여올 때 그를 가리키는 외국말을 그냥 들여다 쓰는 경우다. ‘차탄채 진료, 승차 진료’라고 하면 될 것을 ‘드라이브 스루 진료’라고 하고 ‘통째 격리, 동일 집단 격리’라고 할 것을 ‘코호트 격리’라고 부른다. 성범죄에서 새로 등장하는 ‘온라인 그루밍’도 ‘온라인 길들이기’로 바꾸면 범죄 수법을 명확하게 알릴 수 있음에도 외국말을 쓴다.


 이런 외국어 남용 가운데 국민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있고 비교적 그 영향이 덜하거나 유행어로 그치는 말들이 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주로 나오는 ‘비주얼, 뷰, 레시피, 메인 룸’ 등의 말이야 못 알아듣더라도 국민 생활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공적이지 않고 사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범죄와 관련된 ‘보이스 피싱, 그루밍’, 안전과 관련된 ‘싱크홀, 블랙아이스’, 돈벌이와 관련된 ‘리스크, 서킷 브레이크’, 복지와 관련된 ‘바우처, 커뮤니티 케어’, 참정권과 관련된 ‘컷오프, 패스트 트랙’, 사업 기회와 관련된 ‘규제 샌드박스, 스튜어드십 코드’ 따위의 말은 국민의 생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말들이 법률이나 제도에 들어가면 그 영향력은 더 커진다. 어려운 한자어 때문에 젊은 층이 법률에 접근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영어 능력 떨어지는 사람의 알 권리를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나는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어 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국어 순화 시도가 쓸데없는 간섭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경희대 김진해 교수는 “말에 외국어가 뒤섞이는 현상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이러한 언어자유주의 태도는 외국어 약자들의 아픔에 눈 감기 쉽다. 외국어를 남용하는 사람 중에는 남을 따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영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구별짓기하는, 자신의 국제 감각을 뽐내려는 자들도 많다. 외국어 증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의도된 결과인 것이다. 반대로, 공공언어에서 어려운 외국말 대신 쉬운 우리말을 쓰라는 요구 또한 따돌림당하지 않으려는 외국어 약자들의 의도된 요구이다. 상반되는 의도가 충돌하는 것이 오히려 언어 세계의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그는 “우리 안에 들어온 외국어는 전염성이 있거나 민족정신을 빨아먹는 바이러스가 아니다.”라고 강변한다. 그 외국말들이 민족정신을 빨아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알 권리를 빨아먹는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임은 분명하다. ‘디지털’은 ‘디지털 포렌식, 디지털 리터러시, 디지털 사이니지’ 등으로 전염된다. 


출처: 인하대신문(인하프레스) -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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