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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대학생기자단

우리말과 시의 합작, 여백의 미 - 김성아 기자

by 한글문화연대 2020. 8. 5.

우리말과 시의 합작, 여백의 미

부제: 지용신인문학상으로 살펴본 우리 시의 특징


한글문화연대 대학생 기자단 7기 김성아 기자

ryuk67@naver.com



 여백의 미는 동양예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흔히 ‘여백의 미’ 하면 회화를 떠올리지만, 글로도 여백의 미를 구현할 수 있다. ‘시’에서 여백은 시인과 독자의 은밀한 소통을 돕는다. 시인은 진공포장을 하듯 펼쳐진 생각을 한 행으로 압축시킨다. 농축된 문장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침묵한다. 독자는 압축된 생각을 다시 머릿속에서 펼쳐낸다. 여백은 이러한 감상이 원활해지도록 생각의 쉼표가 되어준다.

 시 공모전의 평가 기준으로 ‘여백의 미를 얼마나 잘 구현하였는가’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침묵과 여백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이 시의 본질이다. 지금부터 대표적인 시 공모전인 지용신인문학상을 통해 시에서 여백의 미가 구현되는 방식을 알아보자. 더불어 여백의 미에 기여하는 한글의 특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지용신인문학상

 지용신인문학상은 향수의 시인 정지용(1902~1950)을 기리고 역량 있는 시인을 발굴하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매년 3월 동양일보에서 개최된다. 많은 작가가 지용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적으로는 ‘어머니의 마을에는 눈이 내린다’의 저자 김혜강 시인,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의 저자 문태준 시인이 있다. 2020년도 26회 문학상은 이선 씨의 ‘아파트 인드라망’, 25회는 김혜강 씨의 ‘알츠하이머’가 받았다.

 지용신인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이 있고, 표현이 참신하며, 수다스럽지 않아야 한다. 특히 수다스럽지 않은 압축적 표현은 소설·수필과 구분되는 시만의 특질이기에 중요하다.



여백의 미를 잘 살린 수상작 소개

 다음은 26개의 당선작 중에서도 압축·정제된 언어를 사용해 여백의 미가 두드러지는 시(14회, 25회)를 가져온 것이다.



4월 / 정영애


사랑을 한 적 있었네

수세기 전에 일어났던 연애가 부활되었네

...

모자란 나이를 이어가며

서둘러 늙고 싶었네

...

길어진 나이를 끊어내며

청년처럼 걸어가면

다시

필사적인 사랑이 시작될까 두근거리네

습지 속 억새처럼

우리 끝내 늙지 못하네

▲ 1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작


 14회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유종호 문학평론가와 신경림 시인은 “시가 말들이 많아 설명으로 떨어지는 추세”임을 지적하며, 이 점을 극복한 ‘4월’을 최종 선정했다고 밝혔다. 위 시는 한 행에 2자-17자가 들어가 간결한 편이다. 행간의 밀고 당김이 있어 폭발성도 갖췄다. ‘다시’라는 행이 침을 꼴깍 삼키고 결승전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느낌이라면, ‘필사적인 사랑이 시작될까 두근거리네’라는 행은 사랑과 운명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듯한 강렬함을 준다.



알츠하이머 / 김혜강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사철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얀 마을에는

기억으로 가던 길들도

눈으로 덮이어

옛날마저

하얀색이다

...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려

바구니에 담을 추억도

색연필 같은 미래도 없어

하얗게 어머니는

수시로

태어난다

▲ 25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작


 25회에서 3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의 시를 평가한 유종호 문학평론가와 오탁번 시인은 “(시는) 다시 썼다가 또다시 말짱 지우고, 종단에는 백지만 남는, 지우기(delate)만 남아있는, 하얀 공백 위에 피어나는 핏빛 꽃봉오리여야 하거늘, 어쩌자고 이렇게 산만하고 지루하게 무작정 길게만 쓰는 것인가”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당선작 ‘알츠하이머’에 대해서는 “아주 단순한 소묘”인 동시에 “시적 변용의 솜씨가 얄밉도록 알차다”라고 평했다.

 위 시의 한 연은 3자-10자로 구성되어 있어 매우 간결하다. 또한, 카메라 렌즈로 밀었다 당겼다 하듯 담담한 언어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 군말이 없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절규와 직설적인 토로로 풀어내면 어땠을까. 심사위원들이 말하는 “산만하고 지루하게 무작정 길게만 쓰는” 글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의 여백에 이바지하는 우리말(우리 문자인 한글과 우리 언어인 한국어)

 위처럼 시에서 여백의 미가 중요하고, 또 두드러질 수 있는 까닭은 우리 문자인 한글의 특성과도 관련 있다. 한글은 라틴어와 달리 모아쓰기 체계를 사용한다. 네모 틀 안에서 자음과 모음 글자가 가로로 결합하거나(예: 가, 거) 세로로 결합하거나(예: 구, 고) 가로·세로 종합적으로 결합하는 구조다(예: 과, 궈). 이렇게 자음과 모음이 합쳐지기 때문에 많은 공간이 들지 않는다. 한글로는 한 칸에 ‘밥’이라고 쓸 수 있는 걸 라틴어는 ‘b’, ‘a’, ‘p’라고 써 세 칸이나 차지한다.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는 한글의 이러한 ‘최첨단 단순성’을 지적하며,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 한국은 세계의 알파벳”이라고 말했다.

 우리 언어인 한국어의 특성도 시의 여백에 이바지한다. 영어는 주어를 잘 생략하는 한국어에 비해 주어를 명확히 밝히는 경향이 있다. 한국어로는 ‘사과가 좋아’ 또는 ‘사과를 좋아해’라고 해도 되지만, 영어로는 주체인 ‘I’를 넣어 ‘I like an apple’이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생략이 자유로운 한국어의 특성은 시의 특성과 잘 어울려 상승효과를 발휘한다.

 


  고재종 시인은 한 문학 강연에서 ‘시인과 소설가 중에 술에 취했을 때 누가 더 말이 많을까?’라는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정답은 모순적이게도 시인이었다. 하고픈 말들을 몇 문장에 눌러 담아야 하니 속앓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거다.

 시인은 1행에, 한 단어에, 하나의 자음과 모음에 인생을 꾹꾹 눌러쓰는 압축의 귀재이다. 압축의 귀재가 모아쓰는 한글과 생략하는 한국어를 만나니 여백의 미는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시인의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만 차치하면, 우리말은 더없이 좋은 시의 짝꿍인 듯하다.




<자료>

한글 조형 탐구 <한글 디자인: 형태의 전환 > https://www.hangeul.go.kr/webzine/201909/sub1_1.html

한국어 vs 영어, 생각의 차이가 곧 말의 차이(네이버 지식 백과) 

세계적 문자 ‘한글’ 경제적 가치 높다 http://m.k-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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